선한 나무               -유치환

 내 언제고 지나치는 길가에 한 그루 남아 선 노송(老松) 있어, 바람 있음을 조금도 깨달을 수 없는 날씨에도, 아무렇게나 뻗어 높이 치어든 그 검은 가지는 추추히 탄식하듯 울고 있어, 내 항상 그 아래 한때를 머물러 아득히 생각을 그 소리 따라 천애(天涯)에 노닐기를 즐겨하였거니, 하룻날 다시 와서 그 나무 무참히도 베어 넘겨졌음을 보았나니.

진실로 현실은 이 한 그루 나무 그늘을 길가에 세워 바람에 울리느니보다는 빠개어 육산의 더움을 취함에 미치지 못하겠거늘, 내 애석하여 그가 섰던 자리에 서서 팔을 높이 허공에 올려 보았으나 그러나 어찌 나의 손바닥에 그 유현(幽玄)한 솔바람소리 생길 리 있으랴.

그러나 나의 머리 위, 저 묘막(渺漠)한 천공(天空)에 시방도 오고가는 신운(神韻)이 없음이 아닐지니 오직 그를 증거할 선(善)한 나무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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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6-06-14 0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좋군요. 어제밤에 축구 보다가 잠시 이누아님 생각을 했어요.전반전이 끝나고 쑥차를 마시면서 '참선 잘 하고 계실까?', 이사는 했을까'하는 생각.
저는 요즘 마음이 무기력증에 빠져서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요. 왜 그런지 나름대로 분석해서 이유를 잘 알면서도 몸이 움직이지 않네요. 이 시를 보고, 마음을 추스려 움직이지 않으려는 몸을 움직여봐야겠어요._()_

잉크냄새 2006-06-14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무라는 시어를 보니, 문득 나무처럼 속으로 나이 먹어야겠다는 어느 시인의 글귀가 생각나네요. 잘 지내시죠?

2006-06-14 14: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14 19: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누아 2006-06-14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덕화님, 여기 비 와요. 시원해요. 동문서답^^
잉크냄새님, 예, 잘 지냅니다. 님도 잘 지내시죠? 미국에 있는 친구 둘이나 방학이라고 귀국했어요. 친구들을 만나니 흥겨워요.
14:45분 속삭이신 님, 경험해 보지 못한 거예요. 기쁘게 메모 남기겠습니다. 너무 염치 없나요?
19:28분 속삭이신 님, 나무가 주는 그 사랑스러움...

2006-06-17 12: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6-28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