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덕화님의 댓글]

똑같이 사람 몸 받았다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님을 느낍니다. 차원이라고 할 수도 있고 쓰고 있는 마음의 안경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에게 실현 가능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구름 잡는 소리처럼 들리는 것도 그래서이겠지요. 이 책에 그런 말이 자주 나오죠. 내 종교와 믿음을 강요하지 말라고. 그래서 저도, 말이 안통하는 사람을 보면 그저, 저 사람과 나는 사는 차원이 다르구나-높고 낮음이 아닌 그저 다른- 하고 생각하고 맙니다. - 2005-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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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동네에 있던 성당에는 좀 젊은 신부님이 계셨어요. 그때 크리스마스 이브에 성경암송 대회랑 연극 등 행사가 있었는데 신부님이 술을 너무 드셔서 심사를 못 보셨지요. 성격도 한 성격하셔서 마을 사람들과 마찰도 있었구요. 그래서 제가 친정 오빠에게

저 신부님은 너무 모가 났어. 보통 신부님들은 덕스럽고 이해심도 많으신데 자기 주장이 너무 강하시고, 날카로워 보여.

그랬더니 오빠가

너는 정말 힘들거나, 화가 났거나, 아니면 잘 몰라서 허둥대던 그런 때가 없었니? 만약 그 기간에 너를 본 사람들은 말하겠지. 그 애는 참 참을성이 없구나, 그 애는 참 어리석구나 하고. 그러나 네가 평온할 때 너를 만난 사람은 그러겠지. 참 차분하구나, 지혜롭구나 하고. 니가 본 다른 신부님들도 저런 과정을 거쳤을지도 몰라. 이 한 시기가 너의 눈에 띄었을 뿐이지. 저 신부님은 아직 많이 젊으시잖아. 저 신부님의 50대를 상상해봐. 내 생각엔 덕이 철철 넘칠 것만 같아. 그러니 사람을 만나면 판단을 미루도록 해.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모습만 갖고 있지는 않아.

오빠의 말은 옳았어요. 그 신부님이 다른 성당으로 가신 뒤에야 알게 되었지요. 신부님 나름대로 형식보다는 마음과 내용을 채워가려고 애쓰셨다는 걸. 다른 신부님이 오셔서 이 성당이 교무금도 적고, 헌금도 적고, 고백성사 때 격식도 잘 모르는 신자들이 많다고 걱정하셨는데 그게 단점도 되지만 가난한 동네사람들에게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으시려고 그랬던 거지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긴 시간 속에서 그저 어떤 모습을 띄고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야구를 계속하면 야구를 잘 하게 되듯 관심과 마음을 두는 곳이 달라 조금 다르게 보일지라도 우리는 모두 어떤 과정 속에 서 있고, 그런 면에서 모두 같지요. 님 말씀대로 안경의 차이겠죠? 관심을 어디에 두느냐 하는.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다른 존재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윤회의 긴 시간터널에서 인간의 몸을 받지 않았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런 일이 가능할지는 모르지만 어렸을 적, 아주 어렸을 적은 아니고 아마도 중학교 3학년이나 고등학생 때 "천사와도 악마와도 대화할 수 있기"를 기원한 적이 있습니다. 가능할까요? 그래도 그런 기원을 한 걸 보면 그게 가능하다고 여겼던 모양입니다. 님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건 님과 자유롭고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때가 있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님이 언제나 수행하고, 타인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한 꼭 그럴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고 있나요? 제가 요즘 말이 너무 많아져서. 그냥 글을 보면 생각나는 대로 이렇게 주절거리고 마니. 핵심은 긴 시간을 두고 보면 모두 같은 사람이며(어떨 땐 사람을 넘어설 수도 있겠지요), 님의 수행으로 님과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관점만 달리하면 세상에 스승 아닌 사람이 없지요. 그러나 저는 아직 잘 안 됩니다. 감정적으로, 이성적으로도 안 될 때가 많습니다만.

평소 님을 스승이나 사형으로 여기고 있는 터라 님의 댓글에 그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적고 보니 혹시라도 무례하게 여기시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글이라는 것이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얘기가 아닌지라...귀엽게 봐 주십시오. 머리 숙여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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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덕화 2005-09-21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맞아요. 이십대의 저, 혹은 삼십대의 저를 본 사람도 지금의 저를 본 것과는 다른 판단을 내리겠지요. 판단을 뒤로 미루는 일. 간단한 것 같지만 참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매사에 판단이 올라오려고 할때 그 마음을 쉬게 하는 것, 이것이 아직은 뜻대로 안되니, 능엄주나 금강경을 읽으며 마음을 다른데로 돌릴 뿐입니다. _()()()_

비로그인 2005-09-21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좋은 말씀. 혜덕화님 말씀에 공감하면서 이누아님의 오빠분 말씀에 머리숙여 감사를 드립니다. 너무 멋지신 거 아녜요. 이 글을 읽는 순간, 머릿속이 명징해져요. 넉넉해져요. 고맙습니다, 라마스테, 합장_()()()_

이누아 2005-09-21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때가 제가 중3때고 오빠가 고2 때였어요. 여전히 우리는 함께 공부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도반이랍니다. 가족 중에 이런 도반이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여하튼 두 분 다 횡설수설하는 제 이야기를 이해하시고 답글을 달아 주시니 감사^^

혜덕화 2005-09-21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의 글에 등장하는 오빠는 분명 전생에 닦은 분일거예요. 고 2때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놀랍네요. 나이가 마흔이 넘어도 그런 생각조차도 없이 남을 판단하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은데...... 좋은 도반을 가족으로 두어서 참 부럽습니다.

이누아 2005-09-22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록 가족은 아니지만 우리도 그런 도반이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