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하다.

오랜 만에 우울하다. 아마도 제사 전 증후군인 듯. 나에게는 명절이 두 번이 아니고 네 번이다. 다른 제사들은 이렇게 증후군까지 생기지 않는데 할머님, 할어버님 제사는 명절이랑 비슷하다. 오시는 분들도 그렇고.

우울하기에 왜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봤더니 그것밖에 없다. 이번 주 일요일은 고종 도련님 결혼으로 울산, 월요일은 시할아버님 제사, 토요일은 어버이날, 그리고 그 다음 주 일요일엔 친정 엄마 생신을 당겨서 행사해야 할 듯(환갑이시다). 그리고 그주 수요일은 시아버님 제사다.

제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하다.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그다지 쉴 새가 없다. 30명 안팍으로 손님이 오시니 낮에는 음식준비하고, 저녁식사 때부터는 "차리고 씻고"가 시작된다. 내가 행사를 싫어하는 걸까? 요즘처럼 사람들 모이기 힘든데 이 정도 찾아 와 주시면 감사하고 즐겁게 생각해야 할텐데 이런 행사가 있으면 조선시대의 상민이나 하인이 된 것 같다. 방에 있는 사람들은 양반 같고.

결혼 전에 우리 과 선배의 강의가 있었다. "실제로 양반집 아낙들은 일을 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물론이고. 상민들은? 남자고 여자고 다 일했다. 그런데 조선 말기가 되자 거의 모두가 성을 가지고 족보를 가지게 되었다. 그 과정은 국사교과서 참조. 그렇지만 성과 족보를 가졌다고 해서 모두 하인을 거느릴 형편은 안 되니 하인의 일은 아내가 맡고, 양반의 체통은 남편이 지니게 되었다"는 말씀. 이 말이 제사나 명절 때 떠오른다. 

일은 열심히 하는데... 모두들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루종일 부엌에 있고, 의사결정권이나 발언권도 없고. 게다가 시댁엔 쉴 방도 없다. 부엌은 실외에 있어서 실내와 완전히 분리된다. 이 점은 괜찮은 점이다. 구식 부엌이라 일하고 나면 허리가 아프지만. 어쨌든 멀쩡하던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느낌이다. 무대 장면 바뀌고, 어둠 뒤에 있다가 다시 막이 시작된다. 아예 역이 바뀌어서. 의사표현도 하고, 농담도 하고, 투정도 하던 나는 사라지고, 헌신적이고 착한 아내와 며느리로 변신한 후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시댁의 "behind story"를 듣게 된다.

그러고보니 대학 때 충청도의 절에서 지낼 때는 고무신 밑창에 구멍이 나도록 뛰어 다니며 일을 했었다. 하루에 일하는 양이 제사나 명절 때과 맞먹는 날이 많았다. 그때는 아무도 원망하지 않고, 이렇게 우울해지지도 않았다. 내가 원해서 했으니까.

문득 찾아오시는 시할어버님이 내 불평을 아신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얼굴도 못 뵌 분이지만 내가 그분께 밥을 차려드릴 기회를 갖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생각을 해볼까? 잘 안 된다.

그래, 수행이다 생각하자. 삶이 통째로 수행이고, 이 일도 수행이다. 지나가던 도사가 저 집에 가서 딱 이틀만 일해주고, 오는 사람에게 음식 베풀고 그렇게 오라고 해도 나는 할 사람이다. 평소엔 집에서 참선하고, 월요일엔 일하면서 화두참선하는 연습하러 가야지! 됐나? 됐다! 내가 원해서 간다! 고?

그냥 이렇게 추스려본다. 이렇게 작은 일에도 마음에 파문이 이는 것을 본다. 아직도 어리고 어리다. 우울은 이것을 쓴 것으로 접는다. 안 접히면 접힐 때까지 기도한다. 그러면 우울은 접수된다. 하하하, 말하고 나니 우울을 기도로 고문해서 조용하게 만드는 것 같다.

기분이 확 좋아지네. 냄비처럼 가벼운 마음이여...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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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4-29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혼하셨군요? 으... 그렇담 다 이심전심입니다.^^

이누아 2004-04-29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선되어야 할 문화인데, 제가 나서서 개선하자면 상처받는 사람이 많을 듯. 특히나 저보다 몇 배는 고생하셨을 어머님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될 수도. 사실, 저도 엄두가 안 나고요. 그나마 어머님이 좋으신 분이라 순응하기 어렵지만은 않지만...이렇게 익숙해져서 머리는 진보, 몸은 구태인 다수의 한국남성들을 닮아가는 건 아닌지...아니겠지요?

다연엉가 2004-04-30 0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생이 정말 수행이라고 믿고 삶니다. 내 마음 먹은대로 행해 지느니....

이누아 2004-05-0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행이라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행위가 남을 위한 행위이거나 강제가 아닌 나를 위한 행위, 나를 향상시키는 연습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행의 본질은 즐거움에 있습니다. 적극성, 강한 믿음, 사랑이 수행을 즐겁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