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없는 이야기

 

 

지금 나는 카페에 와 있어. 코로나19 때문에 편안한 곳이 없지만 오늘은 여기 와 있어. 방금 카운터에 가서 따뜻한 물을 가지고 왔어. 여기 있는 사람 거의 다 아이스커피나 차가운 주스를 마시고 있어. 따뜻한 커피를 마셨는데도 나만 추운 것 같아. 모두 뜨거운가 봐. 펄펄 끓나 봐. 컴퓨터와 책을 앞에 두고 활활 타오르는 사람들 사이 이렇게 일없이 네게 편지를 써.

 

대학 때 절에 가서 몇 달을 지냈어. 선방 스님들 봉양하는 허드렛일을 했는데 보통 그렇게 절에서 지내면 고기가 먹고 싶다거나 짜장면이 먹고 싶다거나 주로 먹는 게 생각이 많이 난다는데 나는 그때 커피숍이 생각났어.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세상이 끝장날 것처럼 떠들던 공간, 가도 되고 안 가도 되는데 괜스레 죽치고 앉아 있던 곳. 어릴 때 숙제했던 기억보다 장난쳤던 기억이 더 잘 나듯이 쓸모없이 즐거웠던 게 가장 그리운 걸까.

 

까페에 앉아 있으면 이곳이 내가 그리워하던 곳이라는 게 떠올라. 그래서 더 흡족해져. 꼭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건 기쁨이 섞여 있을 때라야 가능한 게 아닐까. 나는 도서관에서 콜레트의 소설을 빌려 왔어. 어제는 워시 웨스트모어랜드 감독의 콜레트(2018)*를 봤어. 앨리슨 벡델의 펀 홈(움직씨, 2017)에서 자주 언급되는 이름이라서 찾아봤거든. 다른 책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는데 먼저 내 손에 들어온 것부터 읽고 있어. 읽어도 되고 안 읽어도 되는 책을 읽는 즐거움이 와도 되고 안 와도 되는 까페에서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음악에 젖어 있어.

 

비 소식은 없지만 쏟아질 것 같은 하늘이야. 미리 장을 봐두길 잘했어. 밥솥도 예약 버튼을 누르고 왔어. 여기 좀 더 앉아 있겠다고. 조금 후엔 갈치를 굽고 멍게를 씻고 있겠지. 예보와 달리 비가 올지도 모르지. 그것도 나쁘지 않아.

    

 

 

쓸모없는 이야기

_진은영

 

 

종이

질문들

쓸모없는 거룩함

쓸모없는 부끄러움

푸른 앵두

바람이 부는데

그림액자 속의 큰 배 흰 돛

너에 대한 감정

빈집 유리창을 데우는 햇빛

자비로운 기계

아무도 오지 않는 무덤가에

미칠 듯 향기로운 장미덩굴 가시들

아무도 펼치지 않는

양피지 책

여공들의 파업 기사

밤과 낮

서로 다른 두 밤

네가 깊이 잠든 사이의 입맞춤

푸른 앵두

자본론

죽은 향나무숲에 내리는 비

너의 두 귀

 

_진은영, 훔쳐가는 노래(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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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6-02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레트는 제가 좋아하는 작가인데 <펀 홈>을 읽어봐야겠어요. ^^

이누아 2020-06-03 08:34   좋아요 0 | URL
저는 이제 막 이름을 알게 된 작가예요. 천천히 알아가려구요.^^

서니데이 2020-06-04 19: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누아님, 카페에선 좋은시간 보내고 오셨나요.
시간 있을 때 카페에 가서 책 읽고 시간 보내는 것도 하고 싶은데,
요즘엔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 조금 아쉬워져요.
며칠 사이에 날씨가 많이 더워졌어요.
항상 건강하시고 편안한 하루 되세요.^^

이누아 2020-06-04 20:23   좋아요 1 | URL
예. 시절이 이래서 꼭 해야 할 일이 아니면 조심해야 해서 자주 가긴 어렵지만 날이 더워지면 더 가고 싶어져요. 그래도 자제해야겠죠. 서니데이님도 편안한 저녁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