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수

 

 

동서는 사주를 믿어?”

오래전에 둘째 형님이 뜬금없이 물으셨어. 나는 그때 이렇게 대답했어.

사주보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지만 보는 사람 따라 사주 풀이는 차이가 크게 나요. 고수는 좋은 점을 발견해서 이야기해 주고, 하수는 나쁜 점을 말하지요. 그러니까 나쁜 이야기를 들으셨으면 그 도사가 하수구나, 생각하시면 돼요.”하고.

 

관상 본 적 있어? 난 관상을 배워본 적이 있어. 배우려고 마음먹고 배운 건 아니고, 다니던 서당 선생님이 문화센터에서 관상에 관한 책으로 한문을 가르치게 되면서 엉겁결에 배웠어. 사실 선생님도 관상에 별 관심이 없었는데 문화센터에서 논어고문진보보다 관상이 더 인기가 있을 거라고 한 것 같아.

 

어쨌든 한문에는 고수였으나 관상에는 아직 고수가 아닌 선생님과 한문에도 관상에도 하수인 학생들이 모여 1년 정도 공부를 했어. 공부하는 중이어서 그땐 사람들 얼굴을 보면 막 보이는 거야. , 부부 사이가 안 좋겠다, 돈이 새나가겠다, 성격이 별나겠다, 등등... 근데 안 좋은 것만 보였어. 게다가 얼추 맞추는 것도 같고.

 

남편도 3년 정도 관상을 배운 적이 있대. 남편의 선생님은 관상 전문가였어. 평생 관상만 보신 분이지. 그 분야에 명성이 있어서 만화 작가가 찾아가 그분을 주인공으로 관상에 대한 책을 썼지. 본인은 본래 재물복이 없다고 아예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사시는 분이라나. 남편이 천창(이마 양옆)이 꺼져서 저는 재물복이 없겠습니다.’ 했더니 무슨 소리, 지각()이 풍부하고, 코도...’ 하셨대. 그러니까 한 가지로 판단하지 않고, 늘 서너 가지를 갖고 종합적으로 이야기하시는데 나쁜 소릴 하시는 걸 별로 들어본 기억이 없대.

 

그 선생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사람 얼굴이야 그 얼굴이 그 얼굴인데 관상 보는 사람 따라 운 좋은 얼굴도 되고 나쁜 얼굴도 되는구나, 싶었어. 어떤 얼굴도 다 나쁜 운만 있지는 않을 거야. 모든 얼굴에서 좋은 운을 발견하고, 그걸 중심으로 조언을 해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정말 고수의 기술이 아닐까. 나쁜 운을 말하고, 불안하게 하고, 그걸 자신이 잘 알아본다고 으스대는 게 하수지.

 

고수란 상대의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 좋은 점으로 나쁜 점을 잊게 하는 사람, 상대가 이야기한 후에 더 편안해지고,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는 사람이 아닐까. 그러려면 넓고 멀리 보는 눈이 있어야 할 것 같아. 난 요즘 만나는 사람들의 단점이 잘 보여. 그럴 때마다 나는 하수구나. 한 가지만 보고 판단하는구나, 생각해. 부럽다, 고수의 눈, 고수의 손길!

 

모든 사람에게는 고사하고, 일단 우리 가족에게라도 고수가 되면 좋겠어. 우리 엄마는 다른 형제한테는 몰라도 내게는 확실히 고수였어. 도사에게 들은 말인지, 엄마 말인지 모르겠는데 엄마는 늘 내가 어디 가도, 누구를 만나도 그곳이 좋아지고, 그 사람이 흥할 거라고 하셨어. 무심히 들었는데 무의식중에 그 말이 사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엄마의 말이 온전히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알아도 여전히 괜찮은 암시 같아. 나도 아이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고수의 비법을 엄마에게 좀 배워야 할 텐데.

 

 

 

_가네코 미스즈

 

밤은, 산이랑, 숲의 나무랑,

둥지 안 새랑, 풀잎이랑,

귀여운 빨간 꽃에게까지,

검은 잠옷 입히지만

내게만은, 그러지 못해.

 

나의 잠옷, 새하얘요.

그리고 어머니가 입혀 주시죠.

 

-가네코 미스즈, 내가 쓸쓸할 때(창비, 2018),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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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09 1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7-09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탈리 2019-07-09 13: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엄마가 입혀 주시던 옷처럼
님이 만나는 사람들이 그 결을 따라 고운 빛으로 흐를 것 만같네요. 엄마의 말처럼 세상 든든한게 또 있을까요.
늘, 님의 글 기다렸다가 잘 읽고 있어요.

2019-07-10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9-07-10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수였군요... ㅎㅎㅎㅎ 급반성합니다.. ^^;;

이누아 2019-07-10 12:38   좋아요 0 | URL
님의 비판은 역자를, 저자를, 출판사를, 독자를, 저를, 깨우칩니다.^^
이보다 더 고수일 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