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에 한 번 돌아오는 이 원고를 쓰는 일에 벌써 꾀가 난 걸까? 처음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는 어떤 책을 골라야 할지, 어떻게 읽어야 할지, 어떻게 써야 할지, 모든 것이 고민, 고민이었고 시간도 엄청나게 걸렸다. 그런데 이번 달에는 번역 원고 마감까지 겹쳐서 시간의 압박이 너무나 심한 까닭에 일단 좀 빨리, 쉽게 읽을 만한 책을 선정 기준으로 삼았다. 사실 바쁘고 바쁜 우리의 삶에서 빠르고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은(기본적인 알맹이가 충실하다는 전제하에) 커다란 미덕이고 장점이 아닐 수 없다.
과연 나의 예상대로 책은 전체 분량도 가볍고, 짤막한 에세이들이라 오랜 시간의 집중 없이도 틈틈이 읽기에 좋았고, 청소년을 주요 대상층으로 잡은 만큼 쉽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꼭 쉽게 가려는 이유에서만 이 책을 고른 것은 아니다. 먼저 이 책의 기획자인 정재승 교수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이 있었다. 몇 년 전 『과학콘서트』를 읽은 이후로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거기다 스물일곱 명의 현직 과학자들이 자신의 전공 또는 관심 분야를 차례로 소개하는 이 책을 통해서 제2, 제3의 정재승 교수 같은 스타 과학저술가의 후보를 점쳐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운이 좋다면 짧은 시간에 적은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맛볼 수 있는 그런 독서 경험이 될지도 모를 터였다.
이런 종류의 책, 특정 주제에 대해 여러 저자들의 에세이를 모은 앤솔로지anthology 형식의 책들은 사람들 사이에 호불호가 갈리는 편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편이다. 몇 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읽게 된 기 소르망의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한국경제신문)이라는 책이 맨 처음 이런 책에 대한 구미에 불을 댕겼던 것이다. 기 소르망이 20세기의 최고의 사상가들을 선정하고 직접 인터뷰하여 글로 엮어낸 이 책은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읽으면서 감탄하고 기뻐서 흥분했던 보석 같은 책으로 기억한다. 그 이후 단 한 권으로 수많은 석학들의 알짜배기 세계를 한꺼번에 맛보는 것에 재미를 붙인 나는 존 브록만의 『앞으로 50년』(생각의나무), 『우리는 어떻게 과학자가 되었는가』(사이언스북스), 『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소소) 등의 책을 찾아 읽었다.
현대 과학자들, 특히 나의 관심 분야와 거의 완벽하게 일치하는 브록만 사단의 과학자들이 쓴 글을 모은 이 책들은 나올 때마다 커다란 기대를 가지고 책을 펼쳐 들게 했다. 여러 저자의 글 가운데는 옥석이 섞여있고 때로는 유명한 저자의 성의 없는 소품 같은 글이 실려 있어 실망한 적도 있지만, 보석 같은 글을 몇 개만 발견해도, 이전에 몰랐던 뛰어난 저자를 한두 명이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기회가 되어도, 나머지 그저 그런 글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용서가 되고도 남는다. 이 책, 『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을 던지다』를 처음 접했을 때도 브록만 시리즈(?)가 떠올랐다. 정재승 교수가 뛰어난 식견과 인맥을 가지고 한국의 존 브록만 같은 역할을 맡은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든 과학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뛰어난 과학자들과 일반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는 이와 같은 시도는 결과에 대한 평가를 떠나서도 손뼉을 쳐주고 싶다. 최신 과학의 흐름을 간략하게나마 한 눈에 살펴보고 과학 주변의 흥미로운 주제들에 대해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을 간단히 훑어보면, 1부 '우주, 그 거대한 물음표'에서는 우주에 관련된 현대 과학 이론들을 소개한다.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이 우주 대폭발의 흔적, 별의 일생과 종류, 암흑 에너지, 외계 생명체의 존재 가능성, 우주를 지배하는 궁극의 자연법칙의 가능성을 이야기한다. 2부 '자연, 과학의 시선이 머물다'에서는 지구 내부에 대한 최신 지질학적 설명, 자연의 수학적 패턴, 우주만물이론으로 대두되는 초끈이론, 시간의 다각적 의미 등에 대하여 논의한다. 3부 '생명, 그 경이로움을 해부하다'에서는 최초 생명체의 정체, 우리 삶에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부분, 생명공학이 가져올 미래의 모습, 단백질에 대한 일목요연한 설명, 진화의 경향성에 관련된 오래된 논쟁, 공룡에 대한 최신 과학 등을 다룬다. 4부, '과학, 논쟁 속에서 진검승부를 하다'에서는 과학과 종교의 관계, 서양과학에서 찾은 불교적 세계관의 진리, 역사적 맥락에서 바라본 우리나라 의학의 독특한 상황, 초심리학의 세계,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둘러싼 논쟁, 생물정보학에 대한 소개 등 과학의 주요 분야에서 살짝 비껴있는 흥미로운 주제들을 모아놓았다. 5부, '인간, 그들의 발자국을 더듬다'에서는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하여 추적한 한국인의 뿌리, 마음의 기초가 되는 뇌과학 개론, 과학이 인간의 사회현상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네트워크 과학, 예술 활동이 인간의 전유물인가 하는 도발적 질문, 인공지능 연구의 현주소와 미래 예측, 정신병에 대한 최신 과학적 접근 등을 담고 있다. 이렇듯 이 책은 '우주와 인간 사이에 질문을 던지다'라는 제목에 맞게 우주에서 시작해서 과학의 여러 주제들을 두루 거친 다음 인간에서 끝나는 구성을 보여준다.
어떤 책이든 모든 사람들의 눈높이를 맞추기는 어려울 것이다. 과학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에게는 너무 쉽고 뻔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몇몇 글들은 특정 분야에 대한 교과서식 개론 형식이라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생명과학 쪽이 친숙한 분야라 1부나 2부에 실린 글들이 좀더 새롭고 흥미롭게 느껴졌다.
아쉬움이 있다면 각 글의 분량이 너무 짧다는 것이다. 하나의 글이 대개 7-8쪽 정도의 지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만큼 그야말로 어떤 분야, 어떤 주제에 대한 맛보기에 그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았다. 한참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내다가 제목 그대로 질문 한 마디 던져놓고 사라지는 저자도 있었다. 사실 깊이 들어가지 않고 가볍게 읽기 위해 고른 책이기는 하지만 채널을 휙휙 돌려가며 텔레비전을 볼 때처럼 산만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또 다른 비유를 들자면 파티에 초대받아 여러 사람들을 소개받는 경험과 비슷하다고 하겠다. 멋진 인물들을 한 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가슴 설레는 일이지만 잠깐 인사와 한두 마디 짧은 대화를 나눈 뒤 곧 헤어져버리는 아쉬운 기분이 남는다. 이 책에서 훌륭한 글 솜씨를 선보인 많은 과학자들이 좀더 깊이 있고 풍부한 이야기를 가지고 독자와 만나게 된다면 그것 역시 멋진 일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