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책, 정확히 말하자면 전문서적이 아닌 교양과학서를 읽을  때 우리는 무엇을 기대할까? 음식을 주문해놓고 기대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맛(재미)과 영양(지식)이 골고루 잘 어우러진 음식이라야 먹을 때도 즐겁고 먹고 난 다음에도 뿌듯한 느낌이 남을 것이다. 그런데 이 재미와 지식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아  보인다. 새롭고 알찬 지식이 가득하고 거기에 읽는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는 책을 만나는 것은 희귀하고 신나는 일이다. 널리 알려진 베스트셀러가 아닐 경우 그 기쁨은 더욱 특별하다.

이번에 소개할   『현대과학의 6가지   쟁점』이 내게는   그런 책이다.   이 책의   원제는 ‘Paradigm Regained’로 수학자이자 과학저술가인 존 캐스티가 1989년 내놓은 『패러다임 로스트Paradigm Lost』라는 책의 속편이다. 전편만한 속편이  없다는 말도 있고 더구나 전편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상태에서 속편을 번역 출간하기로 결정하기까지 나름대로  출판사에서 많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런데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전편을 읽지 않고도 충분히 이해하고 음미할 수  있고, 전편에 기대지 않고 독자적으로  그 가치를 충분히 발휘한다. 오히려 전편에서 다루어졌을, 각 주제에 대해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은 뭉텅, 뭉텅 생략하고 논점의 최신, 첨단에 해당되는 부분에 집중했기 때문에 긴장감 넘치면서 꽉 짜인, 그야말로 농축액과 같은 책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생명의 기원, 유전 대 환경, 언어 습득, 인공 지능, 지성을 가진 외계 생명체, 양자적 실재라는 여섯 가지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각 주제에 들어가기에 앞서 과학 그 자체에 대한 관점, 과학의 정의, 우리의 삶 속에서 과학과 과학자의 위상, 그들을 둘러싼 오해와 몰이해, 오용과 악용, 터무니없는 비난, 과학과 종교나 인문학과의 관계 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앨런 소칼의 지적사기 에피소드나  창조론 논쟁 등을 예로 들며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이 책의 논쟁이 ‘과학’의 테두리 안에서 벌어질 것이며 그 경계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다라고 확실하게 선을 그어두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여섯 가지 주제에 대한 논의는 전작을 따라 배심원 재판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각 재판에서 전문가들이 원고 또는 피고가 되어 증거를 제시하고 마지막에 저자 자신이 배심원 중 하나로 나서서 의견을 밝히는 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명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지구상의 생명이 자연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을 통해  생겨났다는 것이 원심의 판결이다. 우리가 흔히,  막연히 알고 있는 원시수프에서 유기물이  만들어지고 그것이 어찌어찌해서 자기복제가 가능한 고분자  물질이 되고 생물로 진화된다는  내용에서 그 ‘어찌어찌’에 해당되는 부분에 대한 현대 생물학의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또한 생명이 외계에서 유래했다는 방사범종설이나 창조론 등 피고의 목소리도 소개된다.

두 번째 본성 대 양육 논쟁에서는 인간의 행동 패턴이 유전자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이 원고의 주장에 맞서 환경의 중요성이나 라마르크주의를 지지하는 실험결과 등 피고의 증거가 제시되었지만 역시 배심원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증거를 유전자의 영향 쪽 손을 들어준다.

세 번째 주제 언어 능력의 선천성 여부는 두 번째 주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뇌의 고유한 선천적 특성에서 나온다는 노엄 촘스키를 중심으로 하는 주류의 주장을 소개하고 그에 대한 반대 의견, 다른 행동과  마찬가지로 언어도 학습된다는 피아제나 스키너의 주장, 촘스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한 샘프슨의 반론을 제시한다.

네 번째는 인공지능, 인간과 같이 생각하는 컴퓨터가 나타날 수 있을지 여부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이다. 이 부분은 유난히도 매력과 흥미가 넘친다. 캐스티의 전공과 가까운  분야이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 정도의 분량으로 인공지능 분야의 연구를 이토록 쉽고, 재미있고, 효과적으로 소개한 다른 글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전작이 나온 이래로 지금까지 인공지능 연구에는 괄목할만한 진전과 성과가 있었지만 인공지능이 결코 인간의 마음을  흉내 낼 수 없다는 존 설, 펜로즈, 드레이퍼스 등의 피고 쪽에는 새로운 증거나 주장이  전개되지 못한 만큼 역시 원심의 판결을 재확인하여 강한 인공지능의 가능성에 손을 들어준다.

다섯 번째는 은하계 안에 우리와 소통할 수 있는 외계 지성체가 존재한다는 주장에 대한 논의이다. 먹고살기 바쁜 나와 같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이  질문이 현대과학의 중요한 논쟁거리 중 하나인가 하는 사실도 의문스럽다. 외계 지성체 탐색 연구(SETI)는 그 활동의 전도사를 자청했던 칼 세이건이 죽은 후 세이건의 존재보다 더 빨리 잊혀져가고 로즈웰 사건만큼이나 희화된 이미지로, 그리고 60년대의 히피문화만큼이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몽상적 과거로 남아있지 않은가? 저자 역시 결론적으로 외계 지성체와의 ‘소통’ 가능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판결을 내렸지만 이 장을 통해서 지금도 스포트라이트가 비껴간 곳에서 외롭게 이루어지는 외계 생명체 관련 연구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고 그 내용은 몹시 흥미진진하고 의미심장해서 6가지 논쟁의 하나로 다루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데에 동의하게 된다.

마지막 주제는 세계의 실체에 관련된  논의이다.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음을 들어 닐스 보어를  비롯한 원고 측은 관찰자에게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는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자연 현상은 우리가 관찰을 하든 말든 늘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피고 측의 주장이다. 결국 저자는  배심원으로서 피고측의 주장을 인정하여 이전의 평결을 뒤집어 원고의 주장을 기각한다. 양자역학 분야에서 전개되어온 논의와 증거들을 담고 있는 이 장은 솔직히 나에게는 너무나  어려웠다. 캐스티는 어려운 주제들도 요점만 간추려 쉽고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지만 돌처럼 단단하고 백지처럼 텅 빈 현대물리학에 대한  나의 무지 앞에서는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던  것이다.

존 캐스티는 숨은 보석과 같은 저자다. 『인공지능 이야기』라는  책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그의 글에 반했다. 수학은 가까이하기에 너무 먼 당신이지만 나는 수학자 출신 작가에 특별한 사랑을 느낀다. 루이스 캐롤,  마틴 가드너, 더글라스 호프스태터에  이어 존 캐스티 역시 수학자이자 ‘최고의’ 책을 남긴 저자들 목록에 망설이지 않고 추가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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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7-10-17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오늘 이른 아침부터 이네파벨님 서재를 뒤적이는 보람이...
리뷰가 넘넘 재밌네요.
세번째, 네번째 논쟁 특히 흥미롭네요. 갠적으로, 펜로즈 '우주 양자 마음' 읽었지만 전혀 접수가 안 되는 그 난해함과 신비로움... ㅋㅋ '마음의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질문 자체는 아주아주 재미있긴 했어요.
다섯번째 질문은 관심없는 영역이고 여섯번째는 넘 어려워보이지만... 이 책 봐야겠군요. 감사...

이네파벨 2007-10-17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권하고 싶어요.
캐스티는 정보를 충실하게 간추려 쉽게 설명하는데 탁월하고...
중간중간 살짝살짝 엿보이는 우아한 유머도 맛깔난답니다.
<인공지능 이야기>도 아주 좋아요~
사실 제가 민스키의 책을 번역하고 있어서 예전에 나온 <인공지능 이야기>를 찾아 읽어보게 되었고 그 후에 이 책을 찾아 읽었죠.
재미있어요~ 이 책~

딸기 2007-10-19 17: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서 봐야겠어요. 심지어는 이 리뷰만 보고서, 과학책 뭐 읽으면 좋을까요 하는 후배에게 이 책을 추천해주기까지 했답니다. "이거 내가 아는 분(^^)이 좋다고 한거니깐 읽어봐!" 하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