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문화가 담긴 꽃과 나무
양경말.김이은 지음 / 황소걸음 / 2025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초등교육 현장에서 아이들과 숲을 걷고, 직접 텃밭을 가꾸며 자연을 삶의 일부로 녹여온 저자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우리 문화가 담긴 꽃과 나무』. 자연과 문화의 매개자 역할을 톡톡히 해냅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꽃과 나무가 사실은 한국인의 삶과 사상, 욕망과 기원을 담은 살아 있는 역사임을 일깨워 줍니다.
학교 숲 체험 시간, 한 학생이 무궁화 잎 찾아오기 카드를 받고는 무궁화를 모른다고 했다고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자연과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한국을 상징하는 꽃과 나무로 포문을 엽니다. 무궁화부터 소나무, 잣나무, 개나리, 오얏나무까지. 우리나라 대표 식물이라는 설명에 그치지 않고, 왜 이 식물들이 한국인의 정신을 대변하게 됐는지 역사적 맥락을 추적합니다.
지금은 전 세계에서 '골든 벨'이라는 이름으로 사랑받는 개나리가 사실은 한국 고유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서양 선교사들이 이 아름다운 꽃을 본국으로 가져가면서 세계화가 시작됐다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우리 식물의 세계사적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합니다.
울타리 밑 봉선화, 장독대 곁의 맨드라미, 대문 앞 접시꽃은 그저 장식물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봉선화가 뱀이나 잡귀를 쫓아낸다고 믿었다고 합니다. 아이들의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여주던 풍습조차 병을 막고 액운을 물리친다는 믿음이 담겨 있었습니다.
접시꽃은 높은 벼슬을, 맨드라미는 다산과 출세를 상징했습니다. 우리가 무심히 지나치는 꽃들이 사실은 조상들의 기원과 꿈을 담은 생활의 주술이었던 셈입니다.
쑥, 칡, 이팝나무 같은 식물들은 배고픔과 맞닿아 있습니다. 그 해 처음 수확한 쌀을 빻아 쑥을 넣고 반죽하는 송편. 쑥은 단순한 나물이 아니라, 절기마다 공동체가 나눈 생존의 지혜였습니다.
이팝나무는 아이들의 굶주림을 위로하려는 애달픈 기억을 간직한 나무입니다. 아이를 묻은 자리에 쌀밥을 실컷 먹여 봤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이팝나무를 심었다는 문장이 가슴을 울립니다. 꽃과 나무가 공동체의 집단적 애도와 소망의 매개체였음을 보여줍니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로 대표되는 사군자는 조선 선비들의 자화상이었습니다. 추위를 이기는 매화, 고고한 난초, 서리를 견디는 국화, 사철 푸른 대나무는 모두 학문과 도덕, 절개와 고결함을 형상화했습니다. 사군자를 통해 우리는 한국 문화의 뼈대를 이룬 사대부 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능소화, 동백꽃, 연꽃, 모란, 목련 같은 식물은 양반의 권위와 미적 취향을 반영했습니다. 책가도 같은 전통 미술 작품에 자주 나오는 나리꽃은 벼슬길에 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의 표현이었습니다. 진달래가 굶주린 백성의 허기를 달래주었다면, 모란은 권세와 화려함을 상징하며 철저히 계급적 상징물이었습니다.

마을 한가운데 느티나무나 팽나무는 그늘의 역할을 넘어 공동체의 구심점이었습니다. 저자는 팽나무 열매를 대나무 총에 넣고 쏘며 놀았다며 어린 시절 놀이 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하기도 합니다. 정자나무는 회의와 제사의 공간이자,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수호신으로 기능했습니다. 은행나무와 버드나무처럼 설화와 신앙이 덧붙여진 사례는 공동체적 상상력이 식물을 중심으로 엮여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대추, 밤, 배, 감, 앵두, 살구 같은 열매들은 제사의 필수품이자 권력의 은유였습니다. 대추가 왕을, 밤이 삼정승을, 배가 육조 판서를, 감이 팔도 관찰사를 상징했다는 설명에서 당시 사회구조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 문화사를 풀어내는 특별한 열쇠 『우리 문화가 담긴 꽃과 나무』. 꽃과 나무를 통해 한민족의 생존, 신앙, 정치, 미학이 어떻게 뿌리내렸는지를 촘촘히 연결해 줍니다.
길가의 민들레, 학교 담장의 개나리, 마당의 감나무가 모두 우리 조상들의 삶과 문화가 담긴 살아있는 역사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이들과의 일화, 개인적 추억, 교육적 통찰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딱딱할 수 있는 식물 지식을 친근하게 만들어 어린이와 어른 모두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