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 우울증 걸린 런던 정신과 의사의 마음 소생 일지
벤지 워터하우스 지음, 김희정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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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설명되지 않는 마음을 기록한 한 정신과 의사의 고백, 벤지 워터하우스의 회고록 『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저자는 영국 NHS에서 수련의로 일하며 환자들을 돌보다가 스스로 우울증 진단을 받게 됩니다. 정신과 의사이자 환자로서, 병동이라는 특수한 공간 속에서 인간의 가장 보편적인 감정들을 마주하고 기록했습니다. 고통의 이면에서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길어 올리는 블랙코미디적 시선이 매력적입니다.


1부 전구증에서는 수련의 초기 경험을 통해 정신 병동이 단순한 치료 공간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복잡성이 응축된 극장임을 보여줍니다.


당직 근무 중 자살 시도 환자를 무심히 대했다가 몇 분 뒤 그 환자가 자신의 환자임을 알게됩니다. 이 사건은 저자의 내면에 깊은 균열을 남기고 결국 무력감과 죄책감 속에서 우울증 진단으로 이어집니다.





"환자들은 가공 처리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움직이는 과일과도 같다. 사과, 오렌지, 바나나 등에 붙는 스티커 대신 우리의 베스트셀러는 조현병, 양극성 장애, 우울증, 감정 불안정성 인격 장애다." p105


저자가 수련 과정에서 배운 이른바 F코드 붙이기 장면은 정신의학의 기계적 측면을 드러냅니다. 환자들은 가공 처리되기 위해 컨베이어 벨트에 실려서 움직이는 과일과도 같다며 증상만으로 진단을 내리는 훈련은 효율적일지 모르지만, 개인사의 복잡성을 지워버리는 폭력이기도 합니다. 『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는 진단 체계라는 객관적 장치 뒤에 가려진 인간의 서사를 끊임없이 환기합니다.


경계성 인격 장애를 앓는 페이지와의 에피소드도 인상 깊었습니다. 학대받은 과거에도 불구하고 팔에 '아빠' 문신을 새기고 있었습니다. “아빠는 아빠잖아요. 아마 항상 사랑하긴 할 거예요. 가족이란 게 복잡해요. 아시죠?”라며 상처와 애정이 공존하는 가족 관계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이 장면을 통해 정신 병동의 환자와 자신의 개인사가 겹쳐지는 순간을 목격합니다.





2부 질병 편에서는 저자가 환자들을 돌보는 동시에 자신이 환자가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가장 아이러니한 장면은 그가 평소 환자들에게 처방하던 플루옥세틴을 자신이 복용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저자는 우울증을 신경 물질의 이상으로 일축해버리는 것은 삶의 복잡성을 과소평가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환청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조현병 환자 말콤의 에피소드는 정신의학의 근본적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말콤은 목소리들 중 어떤 건 친절한데다가 그 목소리들이 자기 말 상대가 되어준다고 말했습니다. 정신질환이 단순히 제거해야 할 병적 증상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는 삶을 지탱하는 방식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저자는 의학적 개입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환자들의 주관적 세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워갑니다. 흥미로운 점은 저자의 개인사와 환자들의 사연이 교차하면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가 희미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마지막 장 3부에서는 회복이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여기서 말하는 회복은 완벽한 치유가 아니라, 복잡성과 모순을 받아들이는 과정입니다. 저자는 더 이상 고통을 단일한 병명으로 환원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마음 자체를 인정하는 태도를 회복의 본질로 제시합니다.


팬데믹 시기 겪은 팬데믹 블루, 환자를 돕기 위한 제도가 오히려 또 다른 억압으로 작동하는 선의의 지옥, 그리고 가족과의 화해 등 개인적, 사회적 층위에서 동시에 회복을 탐구합니다.


벤지 워터하우스 저자는 정신의학을 절대적 권위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병상 부족, 전산 오류로 인한 오진, 강제 입원의 역설 등에서 시스템의 허점을 유머와 풍자로 풀어냅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상황들은 정신 병동이 사회의 축소판임을 보여주며 인종, 젠더, 계급 문제가 그대로 반영되는 공간임을 드러냅니다.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무너짐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용기 있는 고백 『어떤 마음은 설명되지 않는다』. 정신의학이 다 담아내지 못하는 인간 정신의 다층성을 탐구하는 사회적 기록이기도 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고통을 뇌의 화학적 불균형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요? DSM 진단 기준으로 모든 마음의 문제를 분류할 수 있을까요?


저자는 진단명과 처방전으로 해결되지 않는 인간 마음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때로는 설명되지 않는 마음과 마주하는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치유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이 회고록은 그들과 우리를 구분 짓던 경계선을 지워버리고, 누구나 상처와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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