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쉬왕의 딸
카렌 디온느 지음, 심연희 옮김 / 북폴리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늪의 제왕, 마쉬왕이라 불린 아버지. 그는 열네 살 소녀를 납치해 14년 동안 감금한 남자입니다. 납치범에게 붙잡혀 있다 빠져나왔을 때 열네 살 소녀는 스물여덟 살이 되었고 납치범을 꼭 닮은 열두 살 딸 헬레나와 함께였습니다.

 

 

 

안데르센 동화 《마쉬왕의 딸》을 모티프로 한 소설입니다. 이집트 공주와 마쉬왕이라 부르는 괴물 사이에서 태어난 헬가의 이야기. 짧은 동화 한 편을 서스펜스 심리 스릴러로 멋지게 탄생시킨 소설 <마쉬왕의 딸>은 늪지대에서 탈출한 후 성인이 된 딸 헬레나의 시선으로 진행합니다.

 

 

 

남편과 어린 딸 둘을 두고 가정을 이룬 헬레나. 지난 15년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아버지의 탈옥 소식으로 평화는 깨집니다. 그동안 남편에게도 밝히지 못했던 나, 헬레나의 과거. 이 일로 남편 스티븐은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집으로 떠나게 되자 '나'는 이 상황을 고칠 방법, 가족을 돌려받을 방법은 직접 아버지를 잡아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늪지대를 빠져나올 수 있는 자, 아버지.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생각했던 꼬마 소녀와 현재의 내 모습이 얽혀 두려움과 함께 미묘한 감정을 가집니다.

 

나름대로 자신을 12년 동안 돌봐 주었던 아버지에 대한 '나'의 마음은 복잡합니다. 애증의 관계입니다. 어머니를 납치하고 감금했던 아버지이지만 나는 어린 시절 그 모든 것을 아버지로부터 배웠습니다. 반면 아버지를 닮은 나에게 정을 주지 않았던 어머니. 부모님의 관계를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당시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었기에 그저 어머니보다는 아버지를 더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나의 관심사를 갖고 놀면서 아주 교묘하고도 철저하게 엄마에게 등돌리도록 만들었다는 걸 깨닫습니다.

 

어렸을 때 배운 흔적을 추적하는 방법을 이제 아버지에게 겨냥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늪을 다스리는 왕, 마쉬왕. 아버지는 딸이 자신을 추격하리라는 것도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도주 과정에서 네 명을 죽인 아버지. 그가 목표로 삼은 것은 자신을 배신한 헬레나의 대용품으로 삼을 헬레나의 딸들입니다.

 

 

 

아버지와 딸의 추격 장면과 함께 늪지대 오두막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 회상을 오가는 구성은 지금 헬레나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끔찍한 짓을 저지른 아버지는 나에게 그저 순수한 '아빠'였습니다. 하지만 늪지대를 탈출한 건 헬레나의 의지였습니다. 무슨 일로 어린 헬레나에게 사랑이 애증으로 변하게 되는 심경 변화가 생긴 건지 과거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진진합니다.

 

유괴되어 억류 생활을 했던 여성들의 심리적 상태는 어머니의 상황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됩니다. 그것은 스톡홀름 증후군과는 다릅니다. 머릿속 어딘가가 부서져 버리고 자율성을 빼앗긴 사람처럼 의지력이 망가져 도망치지 못하는, 학습된 무기력 상태입니다.

 

늪을 떠날 땐 새로운 삶을 꾸려갈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유괴범이자 살인자의 자식이라는 낙인은 바깥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아이를 절망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엠마 도노휴 소설 《룸》과 닮은 소재여서 재밌게 읽은 독자라면 <마쉬왕의 딸>도 만족할 겁니다. 성인이 된 딸 헬레나의 시선에서 지독히도 나르시시즘을 안고 있었던 아버지와 내면이 모두 무너져버린 어머니에 대한 생각을 섬세하게 잘 표현합니다.

 

야생 그 자체를 살아온 헬레나가 사회에 스며드는 과정,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심경 변화를 묵직하게 다루면서도 아버지와 딸의 치열한 머리싸움은 긴장감을 제대로 선사합니다. 무기력한 피해자 여성의 모습을 뛰어넘어 사이코패스 아버지를 사냥하는 여성 영웅적 면모를 보인 <마쉬왕의 딸>. 그저 욱하는 마음으로 치고 들어가는 게 아니라 섬세하면서도 절제된 심리를 바탕으로 움직이는 헬레나, 무척 매력적입니다.

 

"내가 존재하게 된 이유가 아버지라면, 내가 살아있는 이유는 바로 어머니다." - 책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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