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9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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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 소설 <문>은 산시로 - 그 후 - 문 이렇게 이어지는 소세키 전기 3부작의 세 번째에 해당하는 소설입니다. 갓 20대가 된 대학생활을 다룬 <산시로>와 산시로 이야기의 그 후를 짐작할만한 <그 후>를 읽고, 결혼생활을 다룬 <문>을 읽으면 깊이 있는 감상이 가능합니다. 세 권이 각각 주인공은 다르지만 묘하게 이어져 있거든요.


<산시로>의 산시로, <그 후>의 다이스케, <문>의 소스케. 각 소설의 주인공은 참 많이 닮아있습니다.

소세키의 신경쇠약은 주인공에게도 고스란히 이입되어 있고요. 복장 터질 만큼 답답한 구석이 있기도 한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 측은하기도 하고, 이 시대 청년들의 모습과도 다를 바 없어 답답해지기도 하고 그렇네요.

 

 


소세키 소설 <문>의 시대 배경은 1909년에서 1910년.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 의해 사살된 시기쯤입니다.

근대 도시의 풍경이 형성되던 시점으로 <문>의 주인공 소스케 역시 양복을 입고 북적대는 전차를 타고 출퇴근했다가 집에서는 기모노로 갈아입고 생활하는 인물입니다.

 

 

 


맑게 갠 가을날에 툇마루에 누워 깨끗한 하늘을 바라보는 소스케.

엿새 동안의 정신 활동(회사생활)을 하고 일요일 하루만큼은 유유자적합니다.
경제적 형편은 썩 좋지 않지만, 아내와 6년 차 금술 좋은 부부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동생을 거두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앞일이 닥치게 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숙부 집에서 살아온 어린 동생을 이제는 소스케가 책임져야 할 상황. 그 심란한 마음을 소설 <문> 전체의 반 정도를 차지할 만큼 소스케의 성격을 이야기하는 것에 작가는 꽤 공을 들입니다. 나쓰메 소세키 작가 특유의 생각의 흐름을 묘사하는 문장이 <문>에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네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구나 짐작할만한 말이나 행동이 오가길래 무척 궁금하게 만들기도 하는데요, <그 후>를 읽은 독자라면 <그 후>의 다이스케가 한 행동을 통해 예측 가능합니다. <그 후>의 다이스케는 집안에서 소개하는 여자가 아닌 친구의 아내를 선택하면서 열린 결말을 안겨주었습니다. <문>은 그 열린 결말의 한쪽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문>의 소스케 아내는 소스케 친구의 동거녀였지만 소스케와의 사랑을 택했습니다. 그 일로 그들은 부모, 친구, 친척, 학교, 사회를 버리고 버림받게 된 셈이죠. 몇 번의 유산을 겪은 아내는 그 일로 벌을 받는다는 심정이고, 소스케 역시 부족한 살림살이를 족하다고 체념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도 권태롭지만 행복하다고 평가할 만큼 부부간의 정은 돈독합니다. 단조롭고 자극없는 부부생활이지만 소스케와 아내는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서 곁을 지킵니다.

 

『 가슴의 힘줄이 갈고리에 걸린 듯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 - p69

 

『 외부를 향해 성장할 여지를 발견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은 내부를 향해 깊이 뻗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 - p169


소스케는 원래 상당한 자산가의 아들로 미래도 창창해 보이고 늘 새로운 세계에만 쏠려있을 정도로 젊은 시절엔 한마디로 잘 나갔던 사람입니다. 그런 성격이 이제는 인내와 체념에 익숙해졌고, 미래나 희망을 생각하지 않는 생활을 하고 있지요. 성공이란 단어는 자신과는 인연없는 단어이고 자신을 실패한 사람이라 여깁니다.


『 그저 자연의 은혜인 세월이라는 완화제의 힘만으로 간신히 안정을 찾았다. 』 - p210


하지만 운명의 수레바퀴는 멈추지 않는군요.

집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동생 친구라는 사람의 소식을 듣게 되는데 하필 그가 아내의 옛 동거인이었던 소스케의 친구. 자칫 그와 만날 기회가 생기게 된 겁니다.
그를 생각하니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감과 함께 그가 잘 지내고 있다면 자신이 상상한 것만큼 그가 타락하지 않았다는 위로를 받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런 갈등 속에서 그는 해답을 찾으려 병가를 내고 열흘간 선사에 가서 참선하게 됩니다. 실제로 소세키 작가 역시 젊은 시절 참선 체험을 한 경험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참선 과정에서의 사고 흐름이 꽤 리얼하게 묘사되었어요.

고뇌하고 또 고뇌하는 과정은 힘겹기만 합니다. 생각이 안 되는 이유는 머릿속에 이미 그렇게 하자는 속셈이 있어서 안 된다는 것일지도요. 생각이 안되다 보니 생활의 갈등을 해결할 요량으로 경솔하게 산속으로 기어든 어리석음을 탓하기도 합니다.

 

 

 


소세키의 소설 <문> 제목이 나타내는 주제는 참선 수행 과정에서 슬며시 드러납니다.

"두드려도 소용없다. 혼자 열고 들어오너라" 하지만, 소스케는 문을 열 힘이 없습니다. 문을 열면 그곳은 안심할 수 있는 세계이자 마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세계이지만, 이 문을 열지 못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열망으로서의 문. 자력으로 문을 열어야 하지만 깨달음을 얻지는 못한 채 집으로 돌아옵니다. 다행히 친구는 떠났고, 어린 동생의 거취 문제도 집주인의 서생으로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하지만 또 금방 겨울이 오겠지."

과거의 굴레는 여전히 이어져 있는 상태. 지금은 문을 열지도 건너가지도 못하고 출구를 찾지 못한 상황이지만, 언젠가는 출구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여지는 살짝 비추고 있습니다. 인과를 두려워한 채 무의식적 억압과 현재에 대한 망각으로 당분간은 살아가겠지만요. 한번 두드린 문이니 다음번에도 문을 넘어설 일 조금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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