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풍 ㅣ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4
나쓰메 소세키 지음, 노재명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평점 :
소세키의 소설은 참 독특하다. 소설인 듯 아닌 듯 모호한 느낌을 줄 때가 많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세키의 문학관 또는 인생관이 어떤 기법으로든 그의 소설 속에 제법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도련님>에서는 권력, 돈의 힘에 관한 풍자가 엿보였고 <풀베개>에서는 그의 예술관이 고스란히 담겨있었고, 이번에 읽은 《태풍》 역시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며 돈과 인품에 관한 그의 가치관이 여실히 드러난다. 《태풍》의 이러한 계몽적 성격 때문에 소세키의 소설 중 국내에서는 덜 알려지고 덜 언급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놓치기엔 아쉬운 책이다.
소설 《태풍》에는 각각 다른 환경에 처한 세 인물이 등장한다.
인생의 가치관이 뚜렷하게 확립되어있는 문학자 시라이 도야, 부자이면서도 제법 심성이 괜찮은 나카노, 불안한 미래를 안고 사는 작가지망생 다카나야기. 이 세 사람을 통해 소세키 자신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 비생산적인 말을 늘어놓는 학자나 축음기나 다름없이 항상 같은 말만 늘어놓는 교사가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돈은 어디서 오는가? 수억의 돈을 자유자재로 만들어내는 실업가들이 내놓는 티끌 같은 돈 부스러기로 연명해가는 사람이 바로 학자다. 문학자다. 교사이기도 하다. 』 - p17
세 군데의 학교를 전전하다 결국 교직을 던져버리는, 가는 곳마다 이 세상의 현실과 융화되지 못하는 시라이 도야.
돈의 힘으로 살아가면서 돈을 비방하는, 이 세상에 동화될지 동화의 가치에 관한 이중적인 현실, 마음의 고뇌가 드러난다. 자신이 세상에 융해되려고 한다면 그 순간, 도야 자신은 완전히 소멸되어버릴 것이라 생각한다. 자신은 '진정한 인간'으로서 낮은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려 하고 그것이 학문의 목적이라 생각한다. 붓의 힘으로 세상을 깨우치려는, 자신의 길을 지키며 세상에 저항하는 방식을 가진 사람이다. 아내의 처지에서 보면 도야는 돈도 안 되는 바쁜 일만 하는 의지도 없는 남편일 뿐이지만.
『 좀 더 인간다운 사람이 있을까? 』 - p38
작가지망생 다카나야기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비관적이고 외톨이 신세라 한탄하는, 어찌 보면 우리네 청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무사태평한 사람과 속 편한 사람은 도저히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깊은 내면, 인간의 본질에 관한 글을 쓰고 싶어한다. 한마디도 할 수 없는 감탄을 받으며 자신의 이름을 날리고 싶어한다.
나카노는 도야가 말하는 명문, 부자를 칭송하는 이 세상에서 부자라는 환경속에 나름 중용의 길을 걷고 있는 청년이다. 친구 다카나야기를 물심양면 도와주려고 한다. 소세키의 소설에서는 평소 돈 많은 부자들의 권력, 인간의 도덕심과 혼을 타락시키는 도구로서의 돈의 힘을 많이 드러내는 편인데 이 소설에서는 다른 소설의 등장인물에 비하면 의외의 인물이기도 하다.
한편 소세키는 평소 위장병, 결핵, 신경쇠약 등을 앓고 살아서인지 자신의 건강이 좋지 않은 점을 소설 속 인물에게 잘 대입시키는것 같다. 《태풍》에서도 결핵에 걸린 다카나야기를 내세워 몸의 어딘가에 이상이 있으면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의 부담이 된다면서 건강에 관한 언급을 한다.
도야 선생의 현재모습과 다카나야기의 현재는 많이 닮아있다. 그래서 다카나야기는 도야에게 동병상련처럼 호의를 가지고 있지만 도야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제에 돈이 없어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어려운대로 일하면 충분하다며 너무나도 태평스럽다. 그 이유는 도야가 가진 가치관때문이다. 고통, 궁핍, 고독 이런 인생길에서 만나는 인생 그 자체가 문학이며 이런 것들을 맛본 사람이 문학자이고 그렇게 처리한 방법이나 터득한 것을 종이에 옮겨 놓는 것이 바로 문학서가 되는 것이라 한다.
『 당신의 인생은 과거에 있는 것입니까, 미래에 있는 것입니까? 』 - p138
스스로 정한 가치관에 만족을 얻으려고 세상을 위해 일하는 것 뿐인 도야. 과거를 돌아보면 죄가 있고, 미래를 바라보면 병이 있는 다카야나기. 이렇듯 도야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꿈꾸며 너무 세상 바깥에서 머물고, 다카야나기는 자신을 위한 세상을 사는지라 괴롭다. 둘은 똑같이 세상이란 경계에서 벗어난 외톨이면서도, 반면 둘은 다르다.
『 과거가 이러했기 때문에 미래도 이렇게 될 것이라는 억측은 지금까지 살아 있었기 때문에 앞으로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 속단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일종의 사기입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인생이라는 길에 서 있는 사람은 이미 사기꾼입니다. 』 - p184
국민작가라는 칭호를 받는 소세키답게 《태풍》은 일본 메이지 유신이라는 시대적 사회상이 잘 드러나는 소설이기도 하다. 소설 속 도야의 연설을 통해 서양의 이상에 압도되어 눈이 먼 일본인은 어떤 의미에서 모두 노예라고 하기도 하고, 이 시대는 피가 보이지 않는 아수라장이라고도 한다. 우리의 생존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관한 도야의 통쾌한 연설이 나오는 부분은 이 소설이 100년 전 작품이라는 것을 잊게 만들고 현재의 우리 상황처럼 느껴지게 한다.
『 '나'에게는 '나'가 있다. 이 '나'를 내놓지 않고 빈둥빈둥하다 죽어버리는 것은 아깝다. 』 - p201
도야와 나카노의 나름 완성된 세계관, 아직 어느 세계에도 속하지 못하고 삶의 방향과 의미를 찾기 위한 다카야나기의 방황을 통해 바위같은 견고한 세상에 어떤 방식으로 부딪쳐 나아가야 할지 고민해보게 하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