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의 장렬한 삶
김삼웅 지음 / 현암사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청산리 대첩' 하면 김좌진 장군만 기억하는 우리는 역사 왜곡의 피해자다. 

민중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항일 무장투쟁의 독보적 존재로 재평가된 여천 홍범도 장군을 아시는지.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출귀몰한 유격전술로 일본군을 격파해 명성을 날렸던 홍범도 장군의 이야기를 이제 들어볼 시점이다.

 

일제로부터의 조선독립은 무장투쟁으로 쟁취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녔던 홍범도.

항일 독립운동가들이 중국 동북 지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벌인 게릴라 전술, 순수 항일 빨치산의 주역인 홍범도.

그의 척살대상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일진회, 친일파도 포함되었다.

우리나라 무장독립투쟁에 큰 획을 그은 영웅이지만 그의 투쟁무대, 서거 지역, 동서냉전 시대 등 여러 상황이 올바르게 그를 알려지지 못하게 했다. 이미 한쪽으로 기울어진 편향된 역사 인식으로 그의 존재 자체가 없었다가 그나마 '봉오동, 청산리 전투의 영웅' 정도로만 소개된 지도 오래 지나지 않은 시점.

 

김상웅 저자는 우리나라 애국지사, 열사의 평전을 내는 데 노력하고 친일파, 부일 민족 반역자들의 기록들을 밝혀내며 많은 애국열사의 피나는 독립투쟁 과정을 제대로 알리기 위해 노력해 오고 있다. 이번에 또 하나의 숨은 영웅을 알려준다.

《빨치산 대장 홍범도 평전》 이 책은 2013년 10월 25일 홍범도 장군 서거 10주년을 기념하는 뜻에서 집필, 출간되었다.

이 책을 계기로 무장투쟁 역사의 재조명, 홍범도 장군의 위업이 올바르게 정립되길 희망한다.

 

'빨치산'이란 명칭은 당원, 동지, 당파를 의미하는 어원 parti 에서 유래된 partisan(파르티잔)을 말하며 비정규직 유격대를 칭하는 용어로, 군사적으로는 게릴라와 비슷한 개념이다. 해방 뒤 한국전쟁을 전후해 공산주의 계열 빨치산 활동으로 '빨치산'이라는 호칭 자체가 터부시 되고 금기어가 되었다. 이런 '연상 효과'는 평양에서 출생한 항일 빨치산 대장 홍범도 장군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남북에서 동시에 인정할만한 인물이지만 '좌파 독립운동가'로 치부한 남한의 역사는 그를 '망각의 독립군'으로 만들었다.

 

 

평민도 아닌 머슴 출신의 홍범도의 어린 시절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홍범도는 나이까지 속여가며 군대에 나팔수로 지원했는데 당시엔 그저 생계 때문이었다. 그러다 임오군란 이후 서울의 치안과 경비를 평양 병력 일부에서 차출했는데 그 병력에 뽑혀 서울에서 근무하게 되기도 한다. 천부적으로 사격술에 재능이 있었다 한다. 하지만 부패한 군대 때문에 4년여간의 군인생활을 떠나게 하였고 2년간의 금강산 신계사에서의 생활은 스님들로부터 선사들의 구국 항쟁, 역사의식에 눈을 뜨는 개인적으로 중요한 시기가 된다.

 

홍범도가 의병운동에 나서게 된 시점은 단발령에서 김수협을 만난 1895년부터인데 무기를 얻기 위한 최초의 의병 전투는 동지 한 명과 단신으로 시작한 것이다. 산짐승을 잡으며 생계를 유지하던 산포수들의 의병부대를 조직해 활동하다 일본의 총포화약류 단속법에 따른 한국인의 완전한 무장해제 조치를 발단으로 산포수로서는 생업의 포기를 의미한 이 조치에 반발해 그대로 의병으로 전신하게 된다.

군대 복무경력에 오랜 포수 생활까지 더해져 그만의 유격전술을 구사하는 홍범도. 27세부터 40세까지 13년간 치른 초창기 의병활동은 치열했지만, 가족을 인질 삼아 회유책도 쓰는 등 집요하게 계속되는 일제의 탄압으로 국내에서는 더는 항일전을 수행하기 어려운 실정에 이르러 결국 국내에서 쫓긴 의병들은 국경을 넘어 만주, 러시아로 들어가게 된다.

 

 

1919년 3월 1일 만세 시위가 국내에서 일어나면서 이후 대한국민의회가 결성되고 군무부 병력을 기초로 대한독립군이 창건되며 대장 홍범도는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한다. 이전까지는 항일전 의병전쟁의 양상이었다면 이 시기부터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의 성격을 띠게 된다. 대규모 독립전쟁수행을 위한 독립군 부대의 연합이 만들어지고,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독립군이 봉오동 전투 수행한다. 이는 일본군이 독립군에 참패를 당한 역사적인 전투다. 현대무기를 무장한 일본군 1대 대대를 섬멸시킨 대첩. 이는 4개월 뒤 청산리 대첩을 이끌게 되는 독립군의 사기진작에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와 동시에 홍범도는 '독립군의 영웅'이 되는데, 역사적인 청산리 전쟁은 일본군의 보복, 도발로 시작되었다. 청산리 전투는 6일간 크고 작은 10차례에 걸친 전투로 첫 승리는 북로군정서 군의 김좌진 장군이, 두 번째 전투는 홍범도 연합부대가 해내며 10전 10승의 위업을 달성한다. 국치 이래 가장 빛나는 청산리 대첩이었다. 일제 강점기 봉오동, 청산리 대첩을 통해 독립군은 국민적 자존과 결기를 보여 주었다.

 

 

무장독립전쟁에 투신한 지 14년 차, 53세 나이에 러시아령 이만으로 부대를 옮기게 되는데 일본군을 격퇴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일본의 대대적인 학살 이후 활동 근거지를 상실한 무장독립운동가들이 속속 이곳으로 오게 된다. 만주 독립군과 러시아령 빨치산 부대가 통합되어 '대한의용군'이 결성되었으나 이후 러시아의 정치 상황, 국제 정세 변화 등으로 민족파, 준공산파 혹은 공산파의 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홍범도는 이념형 지도자는 아니었기에 중도적 위치에서 조정역을 맡았으나 레닌으로부터 받은 선물, 레닌이 친필 서명한 '조선군대장'이라는 증명서 때문에 해방 후 한국사회에서 그가 배척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자신의 의지와 선택에 따라 군사를 조직하고 전략을 세워 일제와 싸워왔던 홍범도. 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는 처지에 좌절과 울분의 세월로 노년을 보내게 된다. 역전의 항일 투사 홍범도의 노년은 세계사 초유의 사태인 스탈린의 '민족 강제 집단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추방당하면서 더욱 불우해진다. 75세의 나이로 해방 2년 전에 눈을 감게 되는 홍범도의 묘는 아직 카자흐스탄에 쓸쓸히 남아있다.

 

읽는 내내 가슴이 먹먹하고 무거워진다.  한국독립사의 청산리 대첩에 아예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범석의 역사 왜곡, 공산주의 계열 빨치산으로 인한 순수 항일 빨치산들의 배척은 우리가 배워왔던 역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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