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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럴드 프라이의 놀라운 순례
레이철 조이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민음사 / 2013년 8월
평점 :
절판
『세인트 버나딘 요양원. 해럴드에게, 이 편지를 받고 좀 놀라실지 모르겠네요.』 로 시작하는 의문의 편지 한 통이 해럴드 프라이에게 온 날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편지를 보낸 이는 20년 전 양조 회사에서 경리로 일했던 퀴니 헤네시라는 여자인데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작별 인사의 편지이다. 놀라면서도 어찌 보면 담담하게 쓴 답장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려던 순간 도저히 편지를 놓아 버릴 수 없는 해럴드. 다음 우체통까지 좀 더 걷기로 하면서 이런저런 상념에 빠지다 계속 북쪽을 향해 걷게 된다.
그러다 한 주유소 소녀의 말.. "하지만 긍정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해요. 믿어야 한다는 거예요. (...) 인간의 마음에는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주 많아요. 하지만 있잖아요, 믿음이 있으면, 뭐든지 할 수 있어요." 이 소박한 확신이 어린 소녀에게서 아주 당연한 것처럼 나오다니.. 해럴드는 그 자리에서 곧장 북쪽을 향해 계속 걷게 된다.
『 "해럴드 프라이가 가는 길이라고 전해 주세요. 그냥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내가 구해줄 거니까. 나는 계속 걸을 테니, 퀴니는 계속 살아 있어야 한다고." (...) "지금 당장 출반한다고요. 내가 걷는 동안 반드시 살아 있어야 한다고. 이번에는 내가 실망 시키지 않을 거라고 전해 주세요."』

예순 살이 훨씬 넘은 은퇴자 해럴드 프라이.
무기력하다는 깨달음에 짓눌리는 삶을 살아온 그는 우체통을 몇 개씩이나 그대로 지나칠 정도로 사념에 빠져 북쪽을 향했다. 세인트 버나딘 요양원은 그가 사는 곳에서 무려 1,000km나 떨어진 끝과 끝에 자리 잡은 곳이다. 해럴드는 예상치 못한 일은 한 적이 없이 살아왔다. 편지를 부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그의 생각이 자리잡혀 등산화나 나침반도 없고 갈아입을 옷은 물론 휴대전화도 없이 그렇게 계획이란 것이 없이 그냥 북쪽을 향해 걸을 생각이었다. 도대체 퀴니라는 여자는 해럴드에게 어떤 존재였던 것일까.
순간적인 결정.
자신이 한없이 약하다는 생각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자신이 붙기 시작한다. 자유의 느낌, 미지의 장소를 밀고 들어간다는 느낌이 유쾌해진다. 차로 지나다니던 같은 길을 걸어서 가자 삶이 완전히 달라진 것 같다. 어떻게 전에는 이런 것을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았는지. 퀴니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신념으로. 그저 한발 앞에 다른 발을 내놓기만 하면 된다는 그 단순성이 즐거웠다.
『 이제 자신이 느리다는 사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신이 걸어온 거리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 p61
가는 길에 아내 모린과 요양원의 퀴니 그리고 길을 나서게 용기를 준 주유소 소녀에게 각각 엽서를 써 가며 계속 걷는다.
아내 모린의 입장에선 정신이 멍해지는 충격, 노여움, 고통스러운 모욕감이 휘감기는 그 상황이 이해가 되어 안쓰러웠다. 데면데면한 아들 데이비드와 평생 대립을 피하려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왔던 과거를 기억하고 아파하며 길을 걷는 해럴드. 걷다 보면 기억 하나가 갑자기 마음속에서 솟구쳐 오르고. 그만의 고통이 있는 사연들을 끄집어내며 속죄하듯 걷고 또 걷기만 한다. 해럴드는 걸으면서 이십 년 동안 피하려고 했던 과거를 묶은 끈을 풀어가고 있었다.
해럴드의 과거와 걷기를 생각하며 그제야 그의 관점에서 상황을 보게 되는 아내 모린.
그들이 이십 년 동안 키워 온 침묵과 거리는 심각하여 평범한 말조차 공허하게 들리고 상처를 줄 지경에 이르러 있었지만, 해럴드가 처음으로 모든 역경에 맞서서 자신이 믿는 일을 한다는 점, 그런 생각에 미치자 그녀가 떠나지 않고 살아온 이유는, 해럴드와 있을 때 아무리 외롭다 해도, 그가 없는 세상은 훨씬 더 황량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란 걸 깨닫는다.
『 과거는 과거였다. 자신의 출발점을 피할 도리는 없었다.』 - p176
차를 타고 가면 될 것을 왜 굳이 걸어야만 했던 것일까에 관해 처음엔 어찌나 답답하던지. 한편으론 마음 가득 경이감과 더불어 안타까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느끼며 어느 순간 해럴드의 걷기를 응원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거의 포기할 뻔한 순간도 있었지만 결국 87일 만에 요양원에 도착한 해럴드. 그제야 비로소 그의 앞에 놓인 진실을 깨닫게 된 해럴드의 반전과도 같은 상황에 나 역시 매우 놀라며.....
걷기가 과거의 고통을 풀어내게 된 점에 참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나 자신만의 순례의 길을 걷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