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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의 작은 정원들 - 무너진 나를 다시 세우는 골목 정원 이야기
최윤선 지음 / 진선북스(진선출판사) / 2026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매일 타인의 고통과 비명을 보살피는 직업군이 있습니다. 하지만 타인을 살리는 최전선에 서 있는 이들이 정작 스스로의 삶이 깨져가는 신호를 감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중환자실과 응급실이라는 극한의 임상 현장에서 생사의 갈림길을 지키던 최윤선 저자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심각한 번아웃을 경험합니다.
그렇게 마흔 중반이라는 나이에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산림치유지도사이자 숲해설가로 전업한 그는 현재 비퀠(북촌퀘렌시아랩) 도심숲센터 대표로 활동하며, 북촌·궁궐·공원·인왕산 등 도심 속 자연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성장 치유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북촌의 작은 정원들』은 멀리 있는 산과 숲을 찾아가는 탈출형 치유가 아니라, 600년 역사가 숨 쉬는 북촌의 골목과 궁궐, 공원을 천천히 걸으며 식물의 생존 방식과 인간의 내면 회복을 교차시킵니다.
정원이라 하면 높은 담장 안에 정갈하게 다듬어진 인공적 공간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북촌의 작은 정원들』은 선조들이 먼 산의 능선과 자연 경관을 창과 기둥 사이로 빌려와 감상했던 오래된 정원의 지혜, 즉 차경(借景)을 현대의 도시 골목길로 가져옵니다.
출근길 보도블록 틈새의 작은 풀꽃이나 낡은 담장 너머의 나뭇가지 한 그루 앞에 멈춰 서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만을 위한 마음 정원으로 재탄생한다는 시선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복잡하고 극심한 집중력을 요구하는 현대 도시 생활에서 소진된 인지적 주의력이 자연의 감각적 자극을 통해 회복되는 기전을 이야기하는 카플란 부부의 주의 회복 이론, 인간 본성에 본능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생명 및 자연에 대한 애착과 유대감을 재확인 시키는 에드워드 윌슨의 바이오필리아 가설 등 도시 생태학이 건네는 과학적 근거도 짚어줍니다.
이처럼 도심 속 식물을 바라보는 행위가 단순한 감상주의나 위안에 그치는 게 아니라, 실제 신체와 신경계를 안정시키는 유의미한 생물학적 초록색 처방전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열린송현 녹지광장 들판 편에서는 가을이 오면 무작정 잎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줄기와 잎자루 사이에 세포층인 '떨켜'를 만들어 물과 영양분의 이동을 스스로 차단하는 중국단풍에 대해 소개합니다.
우리 눈엔 그저 낙엽으로 보이지만, 식물에게 그것은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다음 봄을 기약하기 위한 전략적인 생존법입니다. 무언가를 손에서 놓지 못해 스스로를 방전시키는 이들에게 저자는 '마음의 떨켜'라는 생태적 언어를 건넵니다. 때로는 능동적인 비움과 단절이야말로 나라는 생명을 살리는 가장 적극적인 회복 전략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창덕궁 희정당 돌담 틈새의 할미꽃, 원서동 궁궐 담장 옆 해치상 발치 돌 틈에서 자라난 고들빼기, 삼청공원 오래된 담벼락 아래의 귀여운 꽃마리 등 꼭 한 번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식물들이 가득 소개되어 있습니다.
특히 북촌로 한옥 골목길 및 화단의 미스김라일락은 이름도 참 재미납니다. 1947년 북한산 털개회나무 씨앗이 미국으로 건너가 개량된 역사를 지닌 식물이더라고요. 도심 골목에서 강렬한 향기를 피워내는 주인공입니다.
『북촌의 작은 정원들』은 도시 공간에 대한 관점을 번잡한 소음의 지옥에서 다채로운 생명력이 들끓는 미세 정원들의 집합체로 역전시킵니다. 내가 서 있는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틈새를 바라보게 만듭니다. 안국역 주차장에서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오동나무 새싹, 원서동 해치상 발치에 뿌리내린 고들빼기처럼 식물들은 도심의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제 몫의 생명을 단단히 다져나갑니다.
우리 동네에는 이름부터 엉뚱하고 웃긴 쥐똥나무가 한 그루 있습니다. 볼품없어 보이던 그 나무는, 어느 봄날 진한 향기로 저를 사로잡아 발길을 멈추게 하면서 비로소 제게 존재를 알렸습니다. 그 앞을 지날 때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로저 울리히의 스트레스 회복 이론처럼 자연의 은은한 자극이 과각성된 교감신경을 다독이는 힘이 있음을 온몸으로 체감합니다.
『북촌의 작은 정원들』에 소개된 식물 사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산책 치유를 받는 느낌입니다. 걸음을 늦추고 허리를 숙여 작은 생명을 바라보는 그 멈춤의 순간이야말로 마음 회복의 기회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