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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를 알면 장수한다 - 37가지 유전자 이야기
설재웅 지음 / 고려의학 / 2026년 9월
평점 :

대중문화의 프레임으로 풀어낸 유전체학의 현재와 삶의 미래 『유전자를 알면 장수한다』. 유전학(Genetics), 유전체학(Genomics)이라는 단어가 가깝진 않지요. 복잡한 염기서열 ATGC, 난해한 의학 용어들의 장벽을 먼저 떠올립니다.
저자 설재웅 교수는 25년간 유전역학(Genetic Epidemiology)을 연구해 온 학자입니다. 유전역학이란 유전학에 질병의 원인을 환경과 생활습관에서 찾는 역학을 결합한 융합학문으로, 암·당뇨·심혈관질환 같은 만성질환의 비밀을 파헤치는 분야입니다.
저자는 미국 유학 시절 영어를 익히기 위해 즐겨 보았던 영화와 뉴스 기사를 렌즈 삼아 전문 의학유전학의 지식을 대중의 눈높이로 번역해 냅니다.
개정증보판으로 돌아온 『유전자를 알면 장수한다』는 총 37가지의 흥미진진한 유전자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2022 개정 교육과정의 과학 용어까지 반영해 청소년도 읽기 좋습니다.

『유전자를 알면 장수한다』는 영화적 상상력과 생명과학 레시피의 절묘한 만남이 돋보입니다. 영화 <아일랜드>를 통해 사람유전체사업과 정밀의료의 윤리적·기술적 지평을 열어젖히고, <뷰티풀 마인드>와 <엑스맨>을 통해 유전자 암호와 돌연변이의 원리를 설명합니다.
영화 <아이 엠 샘>에서는 지적장애를 가진 주인공 샘의 서사 뒤에 숨은 여린X증후군(Fragile X syndrome)과 FMR1 유전자의 비밀을 과학적으로 파헤칩니다. 샘이 보여주는 따뜻한 부성애의 이면에는 분자생물학적 메커니즘이 존재합니다. 유전자의 염기서열 자체가 바뀌지 않더라도 메틸화와 같은 화학적 변화로 인해 유전자 스위치가 꺼질 수 있다는 후성유전학적 설명은, 인간의 질병과 형질이 고정된 결정론이 아니라 역동적이고 복잡한 과정임을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 영화 <미라클 벨리에> 속 청각장애 가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유전학의 가계도 그리는 법과 친척 간 유전정보 공유 비율을 알기 쉽게 풀어내고, 영화 <우리 형>을 통해서는 구순구개열과 같은 유전-환경 상호작용 질병 및 엽산의 중요성을 짚어냅니다. <아이 필 프리티>와 <길버트 그레이프>를 통해 비만 유전자가 운동과 식습관이라는 환경적 노력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흥미진진하게 봤던 SF 영화 <인 타임>의 시간 카운트다운을 세포의 텔로미어와 노화 메커니즘으로 연결짓고, 영화 <크루엘라>의 독특한 반반 머리카락 색상을 고리로 삼아 한 몸 안에 서로 다른 유전정보를 가진 세포가 공존하는 모자이시즘(Mosaicism)과 키메리즘(Chimerism)이라는 신비로운 유전학적 현상을 해설합니다.
<스틸 엘리스>, <더 파더>에서는 65세 이전에 발병하는 비교적 희귀한 조발성 알츠하이머병과 후기발병 알츠하이머병의 차이를 다루며, <가타카>를 통해 맞춤 의료 시대가 안겨줄 공중보건 유전체학의 과제와 비전을 제시합니다.

『유전자를 알면 장수한다』를 읽으며 유전자는 숙명이 아니라 기회이자 지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현대 유전체학은 더 이상 "너는 이런 유전자를 가졌으니 이렇게 살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제기했던 고전적 관점 역시, 오늘날에는 환경과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및 후성유전학적 기전을 통해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습니다.
자신의 유전적 소인(체질, 질병 위험도)을 올바르게 이해할 때, 불필요한 공포에서 벗어나 나에게 최적화된 운동, 영양, 생활습관을 설계할 수 있습니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장수의 비결은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유전자의 특성을 알고 그에 맞게 환경을 다스리는 정밀한 라이프스타일에 있다는 것을 짚어줍니다.
난해한 유전학 개념을 37편의 친숙한 영화 서사와 뉴스 사례로 풀어내 지루할 틈 없이 몰입하게 만듭니다. 내 몸의 유전적 위험 요소를 파악하고 생활습관을 통해 관리하는 실용적 지혜까지 선사하는 생명과학 가이드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