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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늘한 대화 - 인공지능이 인간의 자리에 들어온 뒤, 우리에게 남겨진 질문들
정재승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질문하는 힘을 잃어가는 인간이 답해야 할 미래 『서늘한 대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뇌과학자이자 물리학적 언어로 인간의 선택과 마음을 탐구해 온 KAIST 정재승 교수가 《열두 발자국》 이후 8년 만에 신작 『서늘한 대화』로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인공지능 시대를 맞이한 인간의 위치를 서늘한 감각으로 짚어냅니다. CES 전시장, 학회장, 강연장, 연극 무대 그리고 챗GPT와의 대화창에서 노벨상 수상자, 기업가, 수도승, 학부모, 인공지능과 나누었던 40개의 생생한 담론을 엮어낸 미래 사유 안내서입니다.
이 책의 핵심 키워드는 제목에도 들어 있는 '서늘함'입니다. 저자는 〈사용설명서〉에서 이 서늘함을 두려움에 얼어붙지도 낙관에 취하지도 않은 채 아직 바꿀 수 있는 미래를 바라보는 마음의 온도로 정의합니다.

AI를 두고 우리는 대개 뜨겁거나(열광) 차갑거나(공포)의 양극단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서늘하다'는 그 사이의 감각입니다. 한여름에 에어컨 바람을 맞았을 때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상태이기도 하고요. 흥분을 가라앉히되 얼어붙지는 않는, 일종의 각성 온도입니다.
인공지능은 질문에 답하고 해결책을 제안하는 데 점점 능숙해지고 있습니다. 자료를 정리하고, 여러 선택지를 비교하고, 복잡한 문제를 분석하는 일에서도 인간의 부담을 덜어줍니다. 이런 환경에서 지식의 양과 정답을 찾는 속도만으로 개인의 경쟁력을 설명하기는 어려워집니다.
그렇다면 교육은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요. 『서늘한 대화』는 아이의 성장과 학교 교육을 다루면서 호기심, 공상, 딴짓, 전공을 벗어나는 질문의 가치를 짚습니다. 정해진 시간표를 충실히 따르고 주어진 문제를 빠르게 해결하는 능력만으로는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정답을 찾는 일은 인공지능에 맡길 수 있어도 무엇을 물어야 하는지, 왜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지는 여전히 인간이 고민해야 합니다.
기존 교육이 개인의 성취와 문제 해결 능력을 중심으로 설계됐다면, 앞으로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공동의 결론을 만들어내는 경험도 중요해진다는 것을 짚어줍니다.
미래의 경쟁력은 인공지능보다 더 빠르게 답을 내놓는 데만 있지 않습니다. 기술이 제시한 답을 검토하고, 서로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나누는 능력에도 있습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교육 역시 기계를 이기는 훈련이 아니라 기계가 제시한 답을 인간 사회에 맞게 판단하는 훈련이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인공지능을 사용할 때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질문을 입력하고, 결과를 확인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시 요청합니다. AI는 우리의 지시를 따르는 도구이고, 최종 판단은 인간의 몫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러나 『서늘한 대화』는 이 관계를 뒤집어 보여줍니다. 저자가 늦은 밤 챗GPT와 대화하며 경험한 서늘함은 인공지능이 언젠가 인간을 능가할 것이라는 막연한 예측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다. 인공지능이 자신의 능력을 상당히 정확하게 분석하고, 어떤 능력부터 빼앗아갈지 순서까지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화면 건너편에서 인공지능은 우리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시에 우리의 능력을 측정하고 있었다. 우리가 인공지능을 면접하는 동안, 인공지능도 우리를 면접하고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직장인이 인공지능으로 보고서를 작성한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자료를 정리하는 시간을 줄이는 데 만족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보고서 작성에 필요한 기술뿐 아니라 자료를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능력까지 맡기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을 잘 활용한다는 것은 사용법을 익히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맡길지, 어떤 과정은 직접 수행할지, 결과를 어떤 기준으로 검증할지 정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기계가 일을 대신하는 동안 인간이 판단 능력을 유지할 수 있어야 기술의 편리함도 오래 누릴 수 있습니다.
마음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에는 인공지능이 우리의 언어를 번역했다. 이제는 우리의 감정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다음 차례는 관계일지도 모른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서늘함은 "기계가 빼앗아 갔다기보다 우리가 외로움에 지쳐 마음의 빈자리를 기꺼이 내어줄지도 모른다는 데서 왔다"라고 고백하는 지점입니다. 대개 '빼앗긴다'는 수동태로 말하는데, 저자는 '내어준다'는 능동의 가능성을 건드리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인간이 관계의 어려움을 견디기 힘들어질 때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를 짚어보는 부분이 놀라웠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오해와 갈등, 기다림과 책임이 따릅니다. 반면 인공지능과의 대화는 상대적으로 부담이 적고, 사용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을 조정하기도 쉽습니다. 외로움이 깊을수록 이런 편리함은 강한 매력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노벨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과 정재승 교수가 나눈 대화도 실려 있습니다. 경험하는 자아와 기억하는 자아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행복을 생각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이 순간의 경험이 즐거운 것과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기억하는 것은 다를 수 있습니다. 시간을 절약해주는 기술을 활용하면서도 그 시간에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한다면, 효율의 향상이 삶의 만족으로 곧바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더 오래 살 수 있게 되더라도 그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지 않는다면 수명 연장만으로 행복을 설명하기도 어렵습니다. 기술이 삶의 조건을 바꾸는 동안 삶의 목적은 인간이 계속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남습니다.
『서늘한 대화』를 읽는 내내 좋은 어른과의 늦은 저녁 식사 자리에서의 대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이야기가 오가는 사이에 내 생각이 슬그머니 움직이는 식이거든요. 인공지능이 쓴 미래의 초안이 날마다 도착하는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더 빠른 독해가 아니라 이 문장을 고칠 펜을 내가 쥐고 있는가를 확인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려줍니다.
인공지능 시대의 인간다움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 가득합니다. 기계가 잘하는 일을 무조건 인간이 더 잘해야 한다고 고집하기보다, 기계의 능력을 활용하면서 인간의 경험과 개성을 표현하는 데 집중할 수 있다는 걸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