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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에서 '아니요'가 사라진다면
다그마 가이슬러 지음, 양혜영 옮김 / 윌마 / 2026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거절을 뜻하는 "아니요"라는 글자가 이 세상에서 증발해 버린다면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거절이나 부정의 언어를 타인과의 관계를 서먹하게 만들거나 미움받기 쉬운 부정적인 것으로 지레짐작하곤 합니다. 게다가 "안 돼", "아니요"라는 단어는 어른들의 통제적 금지어로 먼저 체험되기 십상입니다.
그렇기에 거절하지 않고 무엇이든 받아들이는 세상은 언뜻 보기에 갈등도 없고 모두가 만족하는 이상적인 유토피아처럼 비칠지도 모릅니다. 다그마 가이슬러의 그림책 『지구에서 ‘아니요’가 사라진다면』은 이 달콤한 상상을 완전히 뒤엎는 아찔한 사회적 실험을 선보입니다.

로즈 아줌마는 정성을 다해 구워낸 체리 케이크를 아이들과 이웃인 플로리안 아저씨가 거절하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습니다. 밤하늘의 별똥별을 보며 엉뚱하면서도 절박한 소원을 빕니다. "이 세상에서 ‘아니요.’라는 말이 사라지게 해주세요. 누구도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다고요!"라고 말이지요.
다음 날, 거짓말처럼 세상의 모든 거절과 거부의 표현이 자취를 감춥니다. 거절의 부재가 가져온 풍경은 아이들에게 마치 천국과도 같았습니다. 평소 어른들이 무조건 '안 돼!'라고 대답했을 질문들을 퍼붓습니다. 젤리를 저녁밥 대신 한가득 먹고, 밤이 깊어도 잠들지 않은 채 온종일 놀며, 엄마 목소리가 쉴 때까지 동화책을 읽어달라고 떼를 써도 누구 하나 "안 돼"라고 가로막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달콤한 승낙의 연회는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거절이라는 최소한의 방어선과 한계선이 사라진 공간은 아수라장이자 위협적인 위험지대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무절제한 허용은 정당한 자율성이 아니라 위험에 대한 방치로 이어집니다.
낯선 이가 수상한 제안을 하거나, 누군가 불합리하게 타인의 물건을 빼앗으려 해도, 심지어 신체적·정신적 위협을 가해 오는 위험한 상황 앞에서도 그 누구도 자신을 보호할 거부권을 행사하지 못합니다.
타인의 요구나 사회적 압력에 대해 '아니요'라고 소리쳐 저항할 수 있는 언어를 잃어버리는 순간, 개인의 자아는 부당한 침해 앞에 완전히 무방비 상태로 노출됩니다. 결국 '아니요'라는 단어는 타인을 배척하기 위한 공격 무기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자율성, 생명을 지켜내는 최소한의 울타리이자 보루였던 셈입니다.
『지구에서 ‘아니요’가 사라진다면』은 단순히 "위험할 땐 싫다고 말해라"라는 일차원적 범죄 예방 수칙에 그치지 않습니다. 작가는 거절을 둘러싼 인간관계의 심리적 기제와 관계적 회복탄력성을 짚어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 거절을 나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거부나 미움으로 과잉 해석하며 상처받곤 합니다. 로즈 아줌마가 케이크 거절에 상심해 별똥별에 엉뚱한 소원을 빌었던 이유 역시 타인의 거절을 곧 자기 존재의 부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건의 내막을 들여다보면 플로리안 아저씨가 케이크를 거절했던 진짜 이유는 설탕 알레르기라는 개인적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거절을 당하더라도 내 존재 가치가 훼손되는 것이 아님을 인지하고,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구나 하고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해 주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건강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이라는 것을 그림책으로 보여줍니다.
다양한 거절의 표정들을 만나게 된 시간입니다. 고집스럽게, 소심하게, 방어하면서, 화내면서, 부끄럽게, 쾌활하게 던지는 갖가지 '아니요'의 스펙트럼은 거절이라는 행위가 얼마나 다채로운 인간적 맥락과 감정을 내포하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지구에서 ‘아니요’가 사라진다면』은 언제든 자유롭게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안전한 권리가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가 던지는 "좋아요"라는 말도 진정성과 빛을 발하게 된다는 걸 일깨워 줍니다. 남의 기분과 시선에 맞추느라 정작 자신의 진짜 마음을 가두고 살아가는 어른들에게도 울림이 큰 그림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