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 하이드리오타피아, 유골 항아리 매장에 관하여
토머스 브라운 지음, 공진호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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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영원한 기억을 향한 디지털 집착의 시대, 17세기 의사가 들려주는 역설의 해방감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


끊임없이 기록하고 저장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소셜 미디어와 서버에는 우리가 남긴 일상과 사진이 디지털 영원성이라는 이름 아래 쌓여갑니다. 이 거대한 데이터의 무덤 속에서 역설적으로 깊은 피로와 성찰 없는 불안감이 생깁니다. 잊히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오히려 현재의 삶을 짓눌러 오기 때문입니다.


1650년대 중반, 잉글랜드 노퍽주의 한 들판에서 고대 유골 항아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의사였던 토머스 브라운은 죽은 뒤 내가 어떻게 기억될 것인지, 무엇을 남길 것인지, 내 이름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것인지에 대한 인간의 집착을 아주 오래된 유골 항아리 앞에 세워놓습니다.


"화장터의 불길이 사그라지고 마지막 고별 의례가 끝나고 나면, 사람들은 땅에 묻은 벗들에게 영원한 이별을 고하곤 했지. 후대가 망자의 재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캐물으리라고는 짐작도 못하고, 또 자기 유골이 얼마나 오래갈지 겪어 본 적도 없으니, 그런 뒷날의 일 따위는 아예 생각조차 안 하면서 말일세. 그러나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라는 벗에게 부치는 헌사 속 문장이 흥미롭습니다.





토머스 브라운은 후대가 캐물을 줄 몰랐던 사람들을 말하면서 그 후대인 자신이 지금 그 재를 캐묻고 있다는 사실을 슬쩍 드러냅니다. 옛사람들은 자기 뼈가 수백 년 뒤 들판에서 나와 남의 글감이 될 줄 몰랐습니다. 그런데 그 글을 쓰는 토머스 브라운도 자기 글과 뼈가 어떻게 될지 모르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는 정확히 들어맞았습니다.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는 1658년에 나온 뒤 버지니아 울프, 보르헤스, 제발트 같은 후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라고 물었던 그 자신의 두개골이 먼 훗날 무덤 공사 중 파헤쳐져 지역 병원 박물관에 수십 년간 전시되는 수난을 겪고, 1922년에야 비로소 다시 땅에 묻혔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는 인류가 시신을 매장하고 화장해 온 장례의 역사를 살피며, 노퍽 들판에서 발굴된 항아리들의 유래와 시대를 추적합니다. 유물 속 뼈와 재, 소박한 기물들을 다루며 관찰과 상상을 오가는 토머스 브라운 특유의 문학적 문장이 돋보입니다. 특히 electricity(전기), hallucination(환각) 같은 어휘를 영어 문헌에 최초로 등장시켰을 만큼, 새로운 언어를 창조하고 확장하는 남다른 감각을 보여줍니다.


의사였던 토머스 브라운은 시신의 부패와 화장 과정을 과학적인 시선으로 관찰합니다. 거대한 삶의 무게를 지녔던 인간도 뜨거운 불길을 지나면 불과 몇 파운드의 유기 물질과 염으로 축소됩니다. 하지만 허무주의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오열과 애통함을 지나 육체의 물질적 한계를 직시할 때, 비로소 인간 존재에 대한 깊은 경건함과 숙연함이 싹트기 때문입니다.





유골 항아리는 중요한 상징처럼 작동합니다. 그것은 죽은 사람의 흔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기억이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보여주는 물건입니다. 우리는 기록되는 것과 중요한 것을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유명한 사람은 검색되고, 많은 사람이 공유한 콘텐츠는 더 오래 노출됩니다. 그래서 자신을 드러내고 기록하는 일에 점점 많은 에너지를 씁니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것은 기록의 역설입니다. 많이 남긴다고 반드시 오래 남는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오래 남는다고 해서 반드시 본래의 의미까지 보존되는 것도 아닙니다. 이름이 남아도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사라질 수 있고, 물질이 남아도 그것이 누구의 것이었는지는 잊힐 수 있습니다. 저자가 바라본 뼈와 재도 그렇습니다. 그것은 누군가가 존재했다는 강력한 증거이지만, 그 사람의 삶 전체를 복원해 주지는 않습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이 책의 무게 중심은 죽음을 대하는 인간의 내면적 신념으로 이동합니다. 종교적 믿음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영혼의 지속을 믿는 사람과 죽음을 무의 상태로 보는 사람은 죽음을 전혀 다르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사후 세계를 맹신하는 이에게 이승의 삶은 조속히 끝내야 할 과제이자 순교처럼 무겁고, 반대로 소멸을 두려워하는 이에게 죽음은 완전한 무(無)로의 추락이라는 공포로 다가옵니다. 토머스 브라운은 인간이 죽음이라는 불확실성 앞에서 창조해 낸 신념의 스펙트럼을 기이하면서도 숭고하게 관조하며, 내세에 대한 강박이나 완전한 소멸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는 사유의 길을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려 하고, 너무 오래 흔적을 남기려고 하며,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평가까지 미리 걱정합니다. 그런데 유골 항아리를 보면 그렇게까지 남으려고 애써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남기려는 흔적의 의미는 결국 내 손을 떠난 뒤에 만들어집니다.





『누가 자기 뼈의 운명을 알겠는가』는 죽음 이후에도 나라는 존재가 계속 의미 있기를 원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기억되고 싶어 하는 동안 지금의 삶을 놓치고 있지는 않는지를 짚어줍니다. 내가 남길 유산을 지나치게 계산하지 않고, 평가받을 미래의 나를 위해 현재를 희생하지 않고, 언젠가 잊힐 가능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살아가는 습관이 오래도록 몸에 깊이 밸수록 우리는 오히려 죽음에 서툴러진다. 더 오래 살고 싶은 탐욕이 우리를 죽음에 서툴게 만든다."라는 문장으로 브라운은 불멸이라는 헛된 야망을 비워냄으로써, 불확실한 미래와 기억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오늘이라는 현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삶의 정서적 자유와 내면의 평온을 선사받는다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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