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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머무는 마음 - 시가 피어나고 그림이 머무는 자리
나태주 지음, 나난 그림 / OTD / 2026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오늘은 몇 개의 문장, 몇 개의 이미지가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머물렀던가요? 빠른 스크롤과 초 단위로 소비되는 숏폼 콘텐츠의 범람 속에서 우리의 마음은 늘 방문할 뿐 어디에도 제대로 체류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요.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 시인 나태주의 시와 윈도 페인팅 및 <롱롱타임플라워> 연작으로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온 아티스트 나난의 미술이 만났습니다. 『오래 머무는 마음』은 언어가 가진 정서적 여백과 시각 예술이 지닌 치유적 힘이 어떻게 삶의 멈춤에 스며드는지 잘 보여줍니다.

대표작 「풀꽃」처럼 나태주 시인의 시는 어렵지 않고 소담스럽게 다가옵니다. 일상의 아주 작은 존재나 스쳐 지나가는 감정의 순간을 붙잡아 따뜻한 여백으로 만들어냅니다.
아티스트 나난은 한국 최초의 윈도 페인팅 아티스트이자 미술치료를 공부하며 예술의 치유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입니다. 캔버스라는 틀을 넘어 자연과 사람, 공간과 마음을 잇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에서 눈여겨볼 대목은 나난 작가의 작업 노트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나태주 선생님의 시를 처음 읽었을 때, 짧고 담백한 말들 속에는 오래 머물러도 좋을 만큼 따뜻한 여백이 있었습니다. 그 여백은 저를 조용히 쉬게 했고, 제 안의 마음을 오래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그 곁에 제 그림을 놓게 된다면, 그림이 시보다 앞서거나 더 많은 말을 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저 시인님의 시가 독자의 마음속에 조금 더 오래 머물 수 있도록, 제 그림이 조용히 곁을 지키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이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 「작업 노트」 중에서
나난 작가의 말처럼 『오래 머무는 마음』에서 그림은 시가 던진 언어의 잔향 주변에 은은한 색채의 풍경을 깔아주어 그림 위에서 시선을, 그리고 마음을 오래 머물게 만듭니다.
1장은 길가에 무심히 피어난 풀꽃이나 계절의 변화처럼 소소한 풍경을 통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고 긍정하는 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봄이 오니 / 화를 냈던 일 / 부끄러워진다 / 슬퍼했던 일 / 미안해진다 / 꽃이 피니 / 미워했던 일 / 뉘우쳐진다 / 짜증 냈던 일 / 속상해진다 / 나도 분명 꽃인데 / 나만 그걸 / 몰랐던 거다 / 봄이다 이제 / 너도 꽃을 피워라." — 「꽃을 피우자」 중에서
"너도 꽃을 피워라"라는 다정한 당부는 단단한 위로로 다가옵니다. 국민 시로 널리 알려진 「풀꽃」이나 「봄밤」, 「새봄의 전갈」 같은 시들이 나난 작가의 따뜻한 색감과 어우러지며 세상의 모든 작고 외로운 존재들을 따뜻하게 품어냅니다.
2장은 타인과의 관계, 그중에서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지닌 복합적인 레이어를 다룹니다. 나태주 시인이 말하는 사랑은 낭만적 열정에 머물지 않습니다.
"왜 나는 너를 만나고 싶고 / 너를 안아주고 싶은 걸까? / 그건 네가 그동안 오래 잃어버린 / 나 자신이기 때문 아닐까! / 그렇다면 너를 안아주는 일은 / 너를 안아주는 게 아니라 / 결국 / 나를 안아주는 게 아닐까! / 모르겠다 / 얼른 너를 만나 / 너를 안아주고 싶다." — 「포옹」 중에서
타인을 안아주는 행위는 결국 내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지냈던 과거의 나 자신 혹은 내 안의 결핍을 안아주는 성찰적 행위로 확장됩니다.
시 「괜찮아」는 삶의 불완전함과 서툼을 결함이 아닌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품어 안는 따뜻한 자가 치유의 시입니다. "괜찮아 서툴러도 괜찮아 / 서툰 것이 인생이란다"라며 완벽주의적 긴장을 내려놓게 만드는 다정한 위로를 건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살자 / 틀려도 괜찮아 / 조금쯤 서툴러도 괜찮아"라고 건네는 당부 덕분에 스스로에게 관대해질 수 있는 정서적 안식을 받게 됩니다.

3장은 이별, 그리움, 그리고 흘러가는 시간을 받아들이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는 시들이 등장합니다. 원망이나 미련 대신 "다만 사랑해서 좋았단다"라는 담담한 한 마디로 마침표를 찍습니다. 지나간 사랑과 시간에 대한 가장 품위 있는 작별 인사를 건넵니다.
"좋았어 좋았어 / 참 좋았어 / 이별의 인사는 여러 번 / 사랑해 사랑해 / 정말 사랑해 / 사랑의 고백도 여러 번 // 이별의 아픔과 / 사랑의 아쉬움이 / 마음에 남지 않을 때까지 / 끝내 이별을 할 때는 / 가볍게 가볍게 / 손을 흔들며 / 호숩게 호숩게 / 안녕 안녕 / 다만 사랑해서 좋았단다." — 「낙엽처럼」 중에서
시 「멀리 그대의 안부를 묻는다」는 존재의 안녕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고 감사할 수 있다는 마음이 평온을 선사합니다. 이 시를 오래 바라보다 보니 "나 여기 여전히 숨 잘 쉬고 있어요"라는 말이 타인을 넘어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며 격려를 건네는 나 자신으로 다가오더라고요. 그래서 더 애틋하게 다가온 시입니다.
『오래 머무는 마음』은 마음이 머물 수 있는 여백 그 자체를 느끼게 해줍니다. 이 시화집에 담긴 시와 그림은 빠르게 지나쳐버린 하루, 언젠가 놓쳐버린 사람의 손길, 창가로 떨어지던 햇살의 온도 같은 평범한 순간들을 다시 불러냅니다.
저마다의 가슴속에 묻혀 있던 사적인 기억과 감정을 꺼내어 볼 수 있도록 조용히 판을 깔아줍니다. 책장을 펼치고 시 한 편을 읽은 뒤 그림을 바라보는 그 몇 분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감성적 안식처가 되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