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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방 PDE
이혜경 지음 / 북레시피 / 2026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일본 오사카에 거주하며 타인의 다정한 표정 뒤에 숨겨진 욕망과 한마디 말이 삶을 일으키거나 무너뜨리는 극단적 파장에 관심을 기울여온 이혜경 작가의 『처방 PDE』. 물리적 흔적 없이 오직 언어와 심리 조종만으로 이루어진 죽음은 살인인가, 자살인가를 다루는 매혹적인 소설입니다.
정신과 의사 수현은 환자의 상처를 다정하게 보듬는 구원자의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료실 서랍 속 PDE(Psychic Domination Experiment) 파일은 인간의 무의식에 침투하여 스스로 파멸하도록 유도하는 치명적인 고발장입니다.
"수현은 검은 PDE 파일에서 환자 이름이 없는 HI-No. 003 옆에 SI-No. 013을 추가로 적어 넣었다. 앞의 것이 살인(Homicide)을 유도(Incitement)하는 실험이라면, 새로 적은 것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드는 자살 유도(Suicide Incitement)를 뜻한다. 오직 수현만의 은밀한 표식이었다." p204
취약한 상태로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온 환자에게, 의사의 말 한마디는 곧 신의 계시가 됩니다. 수현은 이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 환자의 과거를 재해석하고 결핍에 균열을 냅니다. 물리적 타격 없이, 오직 혀 끝에서 시작되는 설계는 사법 시스템이 증거를 잡을 수 없는 비가시적 살인을 완성해냅니다.

가정폭력 피해자였던 선영은 남편의 알코올 중독 사고사를 자신이 만든 완벽한 범죄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수현의 심리 유도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심리 지배의 가장 두려운 지점은 피해자가 스스로 주도권을 쥐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소름돋는 장면들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흔히 좋은 사람의 특징이라고 여기는 공감 능력, 상대의 결핍을 정확히 짚어내는 섬세함이 여기서는 완벽한 무기가 됩니다. 다정함 자체가 문제라는 뜻이 아니라, 그 다정함을 누가 어떤 목적으로 설계하느냐가 결국 전부라는 사실을요.
선영은 자신이 남편을 단죄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수현의 실험실 안에서 춤추는 마리오네트에 불과했습니다. 작가는 가스라이팅과 심리 조종이 한 인간의 자아를 어떻게 해체하고, 스스로를 비극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드는지 보여줍니다.
하지만 소설은 압도적인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언어로 지배당했던 선영은 그림이라는 비언어적 예술을 통해 수현의 트릭을 복기해냅니다. 법으로는 단죄할 수 없었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예술이라는 언어를 통해 역전되는 순간입니다. 하지만 이 그림의 의미 또한 수현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뿐입니다. 세상은 이 그림을 비운의 천재가 남긴 구원의 이미지로 읽습니다. 그렇게 수현의 범죄는 계속 이어지는 걸까요.

내가 내린 자율적 선택이라는 착각, 그 무서운 통제를 파헤치는 심리 스릴러 『처방 PDE』. 범죄의 무대가 어두운 골목이나 밀폐된 방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처럼 보이는 상담실이라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범죄 도구 역시 흉기가 아니라 말과 기억, 해석, 약물, 타이밍입니다.
『처방 PDE』를 읽으며 받은 기묘한 공포감은 사람은 자신의 행동만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그 행동에 붙인 의미에 의해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건을 따라가면서 범죄를 목격하는 동시에 인간의 의지가 얼마나 취약한 것인지 바라보게 됩니다.
가스라이팅, 심리적 통제, 관계에서의 조종, 권력관계를 이용한 압박처럼 물리적 폭력이 없더라도 선택과 자존감을 훼손하는 행위들이 존재합니다. 『처방 PDE』는 이것을 극단적인 실험으로 확장한 겁니다. 진짜 소름 끼치는 건, 현실의 우리가 그 정교한 조종의 순간을 결코 쉽게 알아차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