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칼에 베였다
김선규 지음 / 부크크(bookk)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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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날것의 언어로 삶의 바닥을 지탱하는 진짜 감정들을 벼려낸 김선규 시인의 시집 『면도칼에 베였다』. 현대 사회의 부조리와 인간관계의 내밀한 상처를 때로는 시니컬하게 때로는 따뜻한 눈으로 포착합니다.


김선규 시인은 문학고을 시 부문 등단 이후 시적 공력을 인정받아온 중견 시인입니다. 현재 문학고을 강원지부 끌림동인 지부장이자 강원문인협회, 원주문인협회 회원으로 왕성하게 활동 중입니다. 그의 삶에서 배어 나온 연륜과 경험이 시집 전반에 깊게 깔려 있습니다.


초반부의 시는 묵직합니다. 「말(馬)과 말(言) 그리고 시(詩)」는 시인의 철학이 돋보입니다. "달리다 지친 말은 / 발목이 꺾였다 / 일어나라 일어나 달리는 것이 / 말이 할 일이다 / 아아 꺾인 말은 배를 깔고 / 누운 채 일어서질 못하는구나 / 말은 이제서야 할 일을 접었다 / 오늘 그렇게 / 말(言)은 발목이 꺾이고 멈춰서야 / 글이 되고 시가 되었다"


달리는 말(馬)과 뱉어지는 말(言)의 대조를 통해, 시인은 끊임없이 앞으로만 달려가야 하는 질주를 멈춰 세웁니다. 이 책을 기획한 유영준 소설가가 소개글에서 언급했듯, 시란 거창한 미사여구가 아니라 "삶을 견뎌내고 살아온 사람이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써 내려가는 거라고 합니다. 김선규 시인의 시는 멈춤으로써 비로소 완성되는 삶의 진실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 혹은 책임을 진다는 것의 진짜 의미를 잊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효율성과 안락함의 늪에 빠져, 타인을 위해 무게를 견디는 일은 피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다 「철과 철(鐵)」 시를 읽으며 한참을 머무릅니다.


"철이 들었다는 건 / 철(鐵)을 들고 산다는 것 / 철이 든다는 건 / 무거운 철(鐵)을 두 손 들어 / 제 홀로 어둠에서 / 벌서듯 지켜내야 하는 일 / 철이 든다는 건 / 철(鐵)을 머리에 이고 / 또 다른 무게로 / 견뎌내야 하는 일..."처럼 '철이 든다'는 동음이의어를 언어적 유희로 삼아, 삶을 지탱하는 진짜 책임감이 무엇인지 직관적으로 보여줍니다.


김선규 시인은 철이 든다는 정신적 성숙의 과정을 무거운 쇠라는 중량감으로 보여줍니다. 어둠 속에서 홀로 벌서듯 지켜내고, 가슴에 쇠를 박은 채 밤을 지새우는 것처럼 말입니다. 삶의 무게를 짊어진 이들의 고단한 초상이 느껴져 슬프면서도, 한편으론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와닿았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때로는 나 자신조차 베이곤 합니다. 표제시 「면도칼에 베였다」는 면도라는 평범한 일상에서 건져올린 자아성찰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그동안 베어져 나간 수염처럼 / 상처받고 나를 떠났을 마음들과 / 내 날카로운 칼질로 턱을 베이듯 / 그 누군가는 피를 흘렸을 선혈 자국 / 아내에게 했던 모진 칼질들 / 자식들에게 했던 날카로운 칼질들 / 하물며 엄마 마음을 내 칼질로 / 베이게 했던 피 흘린 엄마의 심장은 / 지금쯤 아물기는 했으려나 (중략) 난 오늘 아침에도 변함없이 능숙한 / 칼질로 수염을 잘라내고 / 피 나온 상처를 거울로만 보고 있었다."라는 시어가 인상 깊었던 건 자책감을 느끼면서도 결국 아무렇지 않게 다시 수염을 잘라내는 장면 때문입니다. 타인에게 날렸던 모진 말의 칼질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인의 아픔에 얼마나 마비되어 있는지 꼬집습니다.


인생은 종종 배신을 안겨줍니다. 시 「계획」은 요즘 즐겨보는 뜬뜬 채널 속 P들의 여행 스타일이 떠올라 한참 웃었습니다. "역시 계획은 무계획이 / 최고야 / 대책은 무대책이 / 대책인 거고 / 삶도 그렇고 / 사랑도 계획 없이 와서 / 대책 없이 가는 거잖아"


위트 있게 삶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무계획이 최고의 계획이라는 역설은 실패에 불안해하는 이들에게 뜻밖의 해방감을 선사하거든요. 컨트롤할 수 없는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포용의 자세입니다.


상처를 피하지 않고 삶을 바라보는 법을 이야기하는 『면도칼에 베였다』. 표지를 보는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찾아오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책장을 넘겨보면 이 시집이 말하는 베임은 상처 자체보다 상처를 통해 비로소 알아차리게 되는 삶의 감각에 가깝습니다. 살아오면서 무엇에 베이고, 무엇을 사랑했으며, 무엇을 끝내 잊지 못했는지를 떠올리게 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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