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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가장자리 - 부서진 유년의 파편에서 출현한 신경과학자 이야기
데이비드 수실로 지음, 이충호 옮김 / 북하우스 / 2026년 9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 때문에,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에, 좋은 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누군가 성공하면 그 사람의 인생을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하고 싶어집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이해하기 쉬워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한 인간은 그렇게 설명될 수 있을까요?
데이비드 수실로(David Sussillo)는 인공지능과 뇌과학의 접점에서 주목받는 연구자입니다. 구글 브레인과 메타 리얼리티 랩스의 수석과학자로 일했고, 현재 스탠퍼드대학교 겸임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이 이력 뒤에는 어두운 유년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약물 중독에 빠진 부모 아래에서 방임과 폭력을 겪었고, 보육원과 기숙학교 등 여러 시설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절망적인 환경에 처했던 소년이 어떻게 살아남아 세계적인 과학자로 도약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은 과학적 통찰이 어떻게 한 인간의 삶을 구원하고 재구성했는지를 풀어낸 회고록입니다.
저자의 어린 시절은 무질서(1부)와 카오스(2부) 그 자체였습니다. 부모의 약물 중독과 방임, 그리고 끝없는 가난은 어린 소년에게 세계가 언제든 무너져 내릴 수 있다는 극심한 불안을 안겨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혼돈의 한가운데서 그를 일깨운 것은 낡은 보육원 컴퓨터 화면에 찍힌 몇 줄의 코드였습니다.

코딩은 자신이 직접 규칙을 부여하고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최초의 질서 영역이었습니다. 컴퓨터라는 기계는 부모처럼 예고 없이 그를 버리지 않았고, 자신이 입력한 기호 그대로 정직하게 답을 내놓았습니다. 가난과 상처로 얼룩진 아이의 존재감이 무한 루프 문장을 통해 증폭되었던 경험은, 그가 훗날 기계와 인간의 지능을 연구하는 계산신경과학자로 발을 내딛게 만든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질서(3부)'에 접어들며 저자는 체계적인 교육을 받고 학문의 길로 진입합니다. 7학년 시절 접한 콘웨이의 생명 게임 프로그래밍은 그에게 커다란 지적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2차원 격자판 위에서 세포가 살고 죽는 몇 가지 규칙만으로 우주선이나 진동자 같은 예측 불가능하고 복잡한 패턴이 피어나는 현상을 목도한 것입니다.
이것은 훗날 그가 평생을 바쳐 연구하게 될 창발(Emergence)의 직관적 실체였습니다. 신경세포 하나만으로 인간의 기억이나 사랑, 불안, 의식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수많은 신경세포가 연결되고 신호를 주고받는 과정에서 훨씬 복잡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저자는 뇌세포 하나하나를 관찰하는 것을 넘어, 이것들이 한데 얽혀 만들어내는 마음의 거대한 숲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개별 요소의 단순한 합을 뛰어넘는 고차원적 패턴, 즉 창발적 현상으로서 마음을 바라볼 때 비로소 인간 존재의 신비에 다가설 수 있음을 들려줍니다.
보통 성공한 사람의 회고록에는 어느 정도의 정리 과정이 들어갑니다. 어린 시절의 고난은 훗날의 성공을 위한 자양분이 되고, 실패는 배움이 되며, 우연한 만남은 결정적 기회가 됩니다. 책을 덮고 나면 "그래서 이 사람이 이렇게 성장했구나"라는 인과관계가 깔끔하게 완성됩니다. 하지만 수실로의 이야기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세계적인 연구자가 되었다고 해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의미 있는 경험으로 자동 변환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카오스의 가장자리(4부)'에서 그는 예고 없이 밀려드는 극심한 공황발작과 대면하며 다시 한번 삶의 휘청거림을 경험합니다.
저자는 신경과학적 지식이 풍부하다고 해서 삶의 공포나 정신적 통증에서 완전히 면제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여기서 그가 던지는 질문은 "어떻게 역경을 극복했는가?"가 아니라 "왜 여러 조건이 서로 얽힌 결과로 지금의 내가 나타났는가?"에 가깝습니다. 자신을 짓누르는 공포와 분노는 개인의 의지력 부족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환경과 유전적 요소, 뇌의 복잡한 신경망이 상호작용하며 일시적으로 만들어낸 파괴적 패턴이었습니다.
그는 이 절망의 순간에 삶을 포기하는 대신, 치료사와의 상담과 달리기 그리고 규칙적인 루틴을 통해 신경계의 신호들을 조금씩 재조정해 나갔습니다. 무질서와 완전한 질서 사이, 바로 '카오스의 가장자리'에서 균형을 잡는 법을 터득한 것입니다.
마지막 '창발(5부)'에 이르러 저자는 같은 비극적인 유년기를 공유했음에도 완전히 다른 길을 걸어간 누나 에스터의 죽음을 마주합니다. 똑같이 파괴적인 환경에서 자랐지만, 누나는 트라우마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고 저자는 과학자로 살아남았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차이를 흔한 신화인 개인의 뛰어난 재능이나 강인한 노력 덕분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삶은 원인과 결과가 명확히 일치하는 직선 형태의 방정식이 아닙니다. 부모의 중독, 시설에서의 경험, 우연히 만난 멘토, 컴퓨터와의 만남, 유전적 소질, 그리고 수많은 순간의 선택들이 거대한 인공신경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작용한 끝에 출현한 결과물이 바로 현재의 '나'라는 깨달음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그렇게 깔끔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 어떤 기억은 평생 남고, 어떤 관계는 흔적을 남기며, 어떤 상처는 예상치 못한 순간에 다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럼에도 사람은 살아가면서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새로운 관심을 발견하고,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그 과정이 창발입니다.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역경을 극복한 한 과학자의 감동적인 성공 스토리로 끝나지 않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삶을 하나의 연구 대상으로 삼아, 과학적 통찰이 어떻게 삶의 비극을 다루는 치유의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계산신경과학의 핵심 개념인 창발과 인공신경망을 한 학자의 생생한 삶의 서사와 결합해 쉽고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됩니다.
상처받은 과거나 불행한 환경은 결코 나라는 존재의 전모를 규정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신경세포가 충돌하고 연결되며 생각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만들어내듯, 우리 삶 역시 무수한 상처와 방황, 뜻밖의 만남이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언제든 새로운 가능성으로 출현할 수 있습니다. 과거의 파편에 갇혀 한계를 느끼고 있을 때, 『카오스의 가장자리』는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예측 불가능한 가능성과 새로운 출현을 다정하게 일깨워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