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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부시마니쿠스 - 문명 바깥의 슬기로운 사람들
정해종 지음 / 파람북 / 2026년 8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더 많은 생산성과 속도를 요구받는 현대사회에서 문득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토록 바쁘게 달려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이 솟구칠 때가 있습니다. 정해종 작가의 『호모 부시마니쿠스』는 이 질문의 답을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억, 아프리카 칼라하리사막의 부시먼에게서 찾아 나섭니다.
정해종 저자는 시인, 출판인이자 2001년 터치아프리카를 설립해 국내에 낯선 아프리카 현대미술을 꾸준히 소개해 온 전시 기획자이기도 합니다. 『호모 부시마니쿠스』에서는 미공개 부시먼 판화 50여 점과 함께 문명이 삭제해 버린 인간성의 원형을 탐구합니다.
지도자도, 군대도, 경전도, 토지 소유권 문서도 없는 사회. 반사적으로 발전 이전 단계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없음을 결핍이 아니라 설계로 읽습니다. 배타적으로 나눠 가질 필요가 없는 땅, 사람 위에 사람을 세울 이유가 없는 관계, 삶과 종교와 예술을 애초에 분리할 필요가 없었던 세계관 말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수많은 정보를 모니터 화면과 숫자로 소비하지만, 부시먼은 몸 전체의 감각으로 생태의 문장을 독해합니다. 그들에게 대지는 백과사전이며 수풀은 삶의 교과서입니다. 사막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냄새, 풀잎의 기울기까지도 모두 살아있는 기호로 작동합니다.
생태적 독해 능력은 무조건적인 채집이나 무자비한 정복으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인위적으로 쪼갠 시계의 바늘 대신 햇빛과 그림자의 각도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며 자연의 리듬에 삶을 맞춥니다.
오늘 필요한 만큼만 자연에서 얻고, 내일의 생명이 살아갈 여지를 남겨두는 절제의 미학을 지켜냅니다. 필요한 만큼 얻고 충분하다고 느낄 줄 아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자본주의 사회가 유독 서툰 기술이 아닐까요.

부시먼 공동체는 경쟁 대신 협력을, 위계 대신 평등을 유지하기 위한 장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기 폄훼하기 규칙이 대표적입니다. 뛰어난 사냥꾼이 거대한 사냥감을 잡아와도 마을 사람들은 영웅으로 떠받드는 대신, 오히려 “이게 고기냐, 뼈다귀냐”라며 농담을 던집니다.
이 농담은 성과를 깎아내리려는 심술이 아니라, 뛰어난 공로가 권력이나 특권으로 변질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유쾌한 사회적 장치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문명 이전의 미개함으로 치부해온 삶 속에 사실은 질서가 작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하나씩 짚어냅니다.
오만을 경계하고 모닥불 둘레에 모두가 평평하게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풍경은, 무한 경쟁과 우열 가리기에 몰두된 우리들에게 참된 공동체성의 조건을 질문하게 만듭니다.
부시먼의 신화와 영성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여기서 신은 실수하고 후회하는 존재이고, 사람은 동물로 변하며 동물은 조상이 됩니다.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의 경계가 아직 단단하게 굳지 않았던 세계관입니다.
『호모 부시마니쿠스』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원시(原始)라는 단어의 프레임을 뒤집습니다. 문명의 발달 단계에서 뒤처진 낡은 유물이 아니라, 인류가 처음 가졌던 맑고 순수한 감각의 출발점인 시원(始原)으로 바라보자고 합니다. 원시라는 말에는 뒤처짐의 뉘앙스가 있지만, 시원은 출발점이라는 뜻을 가집니다.
"‘원시(原始)’라는 단어를 글자의 위치를 바꾸어 ‘시원(始原)’으로 읽는 것. 그렇게 읽을 때, 부시먼의 삶은 더 이상 문명 이전의 미성숙한 단계에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인류가 한때 누렸고 지금도 부분적으로 유지되고 있는 여러 삶의 방식들 가운데 하나이며, 무엇보다 우리가 잃어버린 안정과 평화, 치유와 생태의 감각을 일깨우는 영적 고향이 된다." - p210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돌아갈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출발점을 돌아보는 일은 가능합니다. 시원의 관점은 현대 문명이 걸어온 길이 과연 인간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었는가를 되짚어보는 기준점이 됩니다.

오늘날 부시먼은 국경과 토지 소유권, 개발과 보호구역이라는 제도 속에서 삶의 터전을 실질적으로 잃어가고 있습니다. 이 현실을 가리고 과거의 생활 방식만 낭만적으로 소비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일 수 있습니다.
식민 지배와 강제 정착으로 전통적인 터전을 잃어가는 위기 속에서, 부시먼 작가들은 조상들이 암각화에 새겼던 신화와 기억을 종이와 판화 위에 재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쿠루 아트 프로젝트 등 현대 부시먼 미술 운동은 서구 인류학의 피동적 연구 대상이었던 그들을 능동적인 창작 주체로 전환시켰습니다.
캔버스를 가득 채운 선명한 색채와 선들은 존재 자체를 증명하려는 강력한 생명의 에너지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문자 없이도 수만 년간 이어져 내려온 그들의 서사는 이제 동시대 미술의 가장 전위적인 언어로 탈바꿈하여 세계와 소통합니다.
호모 부시마니쿠스는 노동과 놀이, 현실과 영성을 나누지 않는 감각을 압축한 상징적 호명입니다. 『호모 부시마니쿠스』는 삶의 번아웃과 관계의 고립에 지친 이들에게 진정한 풍요와 평화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일깨웁니다. 아프리카 칼라하리가 건네는 거대한 고요와 치유의 문장을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