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 - 클래식 무대 뒤, 오케스트라 악보를 둘러싼 세계
김보람 지음 / 사농공상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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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콘서트홀 객석에 앉아 마주하는 오케스트라의 음악은 지휘자의 화려한 손짓과 연주자들의 탁월한 기량만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소리를 근원부터 설계하고 조율하는 결정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악보위원입니다.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한국 클래식 역사상 최초로 악보의 판본과 저작권 그리고 치열한 공연 현장의 실무를 조명한 책입니다.


저자 김보람 서울시립교향악단 악보전문위원은 2005년 서울시향이 재단법인으로 새롭게 출범할 당시부터 현재까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천 회의 공연을 지탱해 온 베테랑입니다.


트롬본을 전공하며 오케스트라의 호흡을 몸소 겪었던 저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 필하모닉과 일본 효고아트센터에서 쌓은 글로벌 전문성을 바탕으로 누구도 쉽게 들여다보지 못했던 무대 뒤의 음악가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풀어냅니다.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은 종이 위에 그려진 음표들이 어떻게 오케스트라의 뜨거운 숨결로 살아나는지, 그 숨 가쁜 이면의 궤적을 낱낱이 보여줍니다. 2005년 서울시향 최종 면접 당시, 정명훈 음악감독이 던진 한마디는 저자의 20년 커리어를 관통하는 거대한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나는 서울시향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로 만들 건데, 악보 전문위원으로서 나를 어떻게 도울 수 있겠어요?” 이 질문은 악보위원이 단순히 종이를 인쇄하고 나누어주는 관리자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예술적 정체성과 소리의 방향성을 지휘자와 함께 고민하는 파트너여야 함을 일깨우는 메시지였습니다.


하나의 시즌 프로그램이 결정되는 순간부터 악보실은 전쟁터로 변합니다. 세계 곳곳의 출판사를 뒤져 지휘자가 원하는 가장 적합한 에디션을 발굴하고, 저작권 관계와 대여료를 확인하는 일부터가 시작입니다.


연주자들이 연주 도중 매끄럽게 악보를 넘길 수 있도록 페이지 턴(Page Turn)의 호흡까지 계산해 악보를 편집하는 디테일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오케스트라 음악의 수준은 곧 악보위원의 역량만큼 완성된다는 거장들의 찬사는 과장이 아닙니다.


클래식 역사에 새겨진 거장들의 음악적 고뇌와 판본을 둘러싼 논쟁을 현장 실무자의 생생한 시각으로 들려주는 에피소드들이 무척 재밌습니다. 대중에게는 다 똑같은 클래식 명곡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지휘자와 악보위원에게는 어떤 에디션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음악의 뼈대와 질감이 완전히 달라지는 치열한 선택의 연속입니다.





말러 교향곡 6번의 악장 순서 논쟁처럼 같은 작품인데도 어느 악장을 먼저 연주해야 하는지를 두고 100년 가까이 논쟁이 이어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악보는 완성된 설계도가 아니라 시대마다 수정되고 해석되는 살아 있는 문서라는 사실을 저자는 현장의 경험을 통해 설명합니다.


브루크너의 웅장한 사운드를 해석하는 하스판과 노바크판의 대립은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마저 들게 합니다. 브루크너의 경우 연구자마다 어느 버전이 원작자의 의도에 가까운지를 놓고 오랫동안 연구를 이어왔습니다. 저자는 학문적 논쟁을 나열하기보다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왜 이 선택이 중요한가를 설명하고 있어 실제 공연 준비 현장을 함께 경험하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둘러싼 복잡무쌍한 저작권 분쟁, 현대음악의 난해한 표기법을 해독해야 했던 '아르스 노바' 시리즈, 그리고 K-팝과 오케스트라의 경계를 허문 SM클래식스와의 협업 과정까지 생생하게 들려줍니다.


정통 클래식부터 대중음악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소리를 인쇄된 종이 위에서 현실로 끄집어내기 위해 벌이는 악보위원의 고군분투는 드라마를 보는 듯합니다. 정명훈, 오스모 벤스케, 얍 판 츠베덴 등 세계적인 마에스트로들이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운드를 설계하기 위해 파트보의 작은 표기 하나까지 얼마나 집요하게 파고드는지, 그 디테일한 소리 설계 방식이 흥미롭게 펼쳐집니다.


악보위원이라는 직업을 이 책으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오케스트라에서 가장 먼저 출근하고 가장 늦게 퇴근하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하지만, 공연이 완벽하게 흘러갈 때는 아무도 그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직 무대 위에서 뜻밖의 사고나 오류가 발생했을 때에만 비로소 그 이름이 소환되는, 전형적인 인비저블(Invisible) 직업군이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의 악보위원들은 국경을 초월해 서로의 악보를 빌려주고 정보를 공유하며 든든한 연대망을 발휘합니다. 베를린 필하모닉부터 파리 오케스트라, 로열 콘세르트헤바우에 이르기까지, 음악이라는 하나의 가치를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손을 맞잡는 전 세계 악보위원들의 에피소드는 울림을 줍니다.


뉴욕 카네기홀 투어의 숨 막히는 일정 속에서 완벽한 공연을 위해 밤을 지새우던 순간들, 도이치 그라모폰 녹음 현장에서 세계적인 작곡가 진은숙과 나누었던 대화의 기록들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세상의 완성도를 끌어올리는 모든 일하는 이들을 향한 뜨거운 헌사이자 찬가입니다.


저자는 클래식의 숨은 매력을 위트 있게 건넵니다. 『악보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읽고 나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화려한 사운드가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들리기 시작할 겁니다. 완벽한 선율 뒤에 숨겨진 수많은 판본의 논쟁, 지휘자의 고뇌가 담긴 보잉 기호, 그리고 연주자가 안심하고 악보를 펼칠 수 있도록 밤을 지새운 악보위원의 치밀한 손길이 겹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완벽한 무대를 위해 자신의 존재를 지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각자의 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톱니바퀴가 되어 세상을 굴려가는 모두의 삶과 닮아 있습니다. 플레이리스트 속에 잠들어 있던 클래식 음악을 전혀 새로운 온도로 경험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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