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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김명순 외 지음, 이루카 엮고 옮김 / 아티초크 / 2026년 7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형태 없는 고통에 이름을 부여한 여성 시인 100인의 치유와 구원의 언어들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 4000년이라는 광활한 시간 속에서 시(詩)로 스스로의 존재를 증명해 낸 여성들의 기록물입니다.
초판 한정 양장본의 표지 그림은 영국 화가 데이비드 인쇼(David Inshaw)의 〈배드민턴 게임(The Badminton Game)〉입니다. 정원에서 두 여성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순간을 그리고 있으며, 공중에 떠 있는 셔틀콕과 함께 시간이 그대로 멈춘 듯한 신비롭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에는 인류 역사상 기록된 최초의 작가인 기원전 2300년경의 엔헤두안나부터 영국의 브론테 자매들, 그리고 우리 근대 문학사의 아픈 손가락인 김명순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성 시인의 시가 담겼습니다.
오랜 시간을 가로질러 여성들이 남긴 목소리는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왜 사랑은 허락받아야 했는가, 왜 재능은 숨겨야 했는가, 왜 슬픔은 침묵 속에서만 존재해야 했는가를 말이죠.

고전을 읽을 때면 당대의 시대상과 작가의 한계를 저울질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시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순간, 그런 저울질은 무색해집니다. 미술, 음악, 연극 등 예술 분야의 진입 장벽이 여성들에게 철저히 닫혀 있던 시절, 그들에게 허락된 유일한 구원은 오직 펜과 종이뿐이었습니다. 재료비 없는 예술, 그래서 허락된 예술이 바로 시였습니다.
에칭 스타일로 복원한 100인의 초상과 함께 시인에 대한 정보가 담겨 시인의 개인사와 시대적 맥락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말할 수 없었던 슬픔을 어떻게든 언어의 형태로 붙잡아두려는 안간힘, 그것이 바로 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입니다.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는 제도와 억압 속에서도 끝내 파괴되지 않은 영혼의 생존 본능을 보여줍니다. 기원전의 메소포타미아 여사제와 19세기 영국의 목사관 골방에서 시를 쓰던 자매들, 그리고 식민지 조선에서 번역과 창작을 멈추지 않았던 신여성의 고통이 겹쳐집니다.
문학사에서 브론테 자매들로 묶여 기억되는 샬럿 브론테와 에밀리 브론테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 서로의 가장 친밀한 문학적 동반자이자 경쟁자로 자라났습니다.

언니 샬럿 브론테가 부당한 사회적 억압과 여성의 희생에 맞서 저항하며 경제적·정신적 독립을 쟁취하는 여성의 여정을 담은 『제인 에어』를 통해 당대에 즉각적이고 폭발적인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면, 동생 에밀리 브론테는 은둔주의적인 성향 속에서 인간 내면의 날것 그대로의 열망과 황량한 야성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불멸의 고전 『폭풍의 언덕』을 집필하여 문학사에 깊고 강렬한 충격을 남겼습니다.
남성 필명으로 공동 시집을 펴내며 세상에 처음 목소리를 드러냈던 이 천재 자매는 서로 다른 결의 뜨거운 문학적 무기를 통해 당대 사회가 규정한 여성을 향한 한계를 완전히 깨부수고 세계 문학사 중심에 그들의 이름을 새겼습니다.
사회가 부여한 아내, 어머니, 딸이라는 역할의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단독자로서의 자아를 갈망하는 목소리도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19세기 영국의 지성 조지 엘리엇(본명 메리 앤 에반스)은 남성 필명 뒤에 숨어야만 했던 억압적 구조 속에서도 인간 내면의 심연을 끊임없이 탐구했습니다.
미국 시문학의 선구자 에밀리 디킨슨의 시 「슬픔은 생쥐」는 슬픔이라는 거대하고 압도적인 감정을 뜻밖의 사물과 형상으로 보여줍니다. 에밀리 디킨슨에게 슬픔은 숨어서 자라나며(생쥐), 나의 온 존재를 앗아가고(도둑), 어설프게 전시될 때 다치기 쉬우며(곡예사), 결국에는 어떤 언어로도 설명할 수 없는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완성되는 것(탐식가)입니다. 슬픔이라는 감정을 지적인 입체감으로 빚어냅니다.

이 책에서 마음을 가장 저릿하게 만든 시인은 한국 최초의 여성 소설가이자 시인, 그리고 5개 국어에 능통했던 천재 번역가 김명순입니다. 기생의 딸이라는 신분적 낙인, 유학 시절 겪은 성폭력 사건과 그로 인한 문단 내 남성 작가들의 악의적인 인신공격 속에서도 펜을 놓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칼날 같은 소리를 피해 스스로의 영혼을 지키고자 했던 절규를 엿듣는 기분입니다.
『슬픔에게 언어를 주자』에 실린 100편의 시는 과장되거나 예스러운 어투를 걷어낸 현대적 번역 덕분에 친근하고 생생하게 와닿습니다. 마음속을 떠돌며 우리를 괴롭히던 슬픔이 있다면 펼쳐보세요. 슬픔에 지지 않기 위해 펜을 쥐었던 100명의 시인들이 건네는 뜨거운 위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