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잠 - 덕자전성시대 덕자의 장편소설
박보미(덕자전성시대) 지음 / 오픈도어북스 / 2026년 7월
평점 :
예약주문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유튜브 '덕자전성시대'로 사랑받는 크리에이터 덕자의 첫 장편소설 『그루잠』. 전혀 다른 존재감을 가진 작가 박보미와 마주하게 됩니다. 멘사 기준 IQ 145라는 이력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영상으로 사람을 웃기던 창작자가 묵직하고 긴 서사로 기묘한 매력을 풍기며 매혹시킨다는 점입니다.


제목 '그루잠'은 잠에서 깨어난 뒤 다시 드는 잠을 뜻합니다. 분명 깨어 있는 것 같은데 여전히 꿈속 같고, 기억하고 있다고 믿는데 가장 중요한 부분은 빠져 있는 상태. 소설은 그 모호한 감각을 유지합니다.





『그루잠』은 상처가 남긴 감정부터 건넵니다. 윤설은 세상을 원망하기보다 스스로를 먼저 돌아보는 사람으로 그려집니다. 작가는 장면을 시각적으로 그리는 감각이 뛰어납니다. 긴 설명보다 하나의 풍경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윤설은 어릴 때부터 엄마의 죽음과 맞바꿔 태어난 존재라는 생각에 늘 완벽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남에게 짐이 되지 않기 위해 언제나 웃는 얼굴로 감정을 숨기며 자랐습니다.


세상은 그런 윤설의 선함을 이용하고 짓밟았습니다. 믿었던 변호사는 합의금을 가로채고 형량을 감경시켜 개인적 이득을 취했고, 10년간 사귄 연인도 윤설의 돈을 빼돌렸습니다.


끝없는 기만과 상실감 속에서 윤설은 스스로를 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차가운 가스 행성인 해왕성의 주민이라 생각하며 세상으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아버립니다.


작가는 인간의 내면에서 피어나는 어둠의 감정을 윤설을 통해 묘사합니다. "그 감정은 마치 곰팡이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부터 서서히 번져 나갔다"라며 타인을 향한 원망이 자아를 잠식해 나가는 과정에 대한 것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일시적으로 발산하는 분노는 뜨겁게 타올랐다가 재를 남기고 꺼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대상을 마음속에 매일 소환하여 끈질기게 씹어 삼키는 원망은 다릅니다. 결국 원망의 가장 무서운 점은 원망하는 주체인 나 자신을 가장 먼저 갉아먹고 썩어 문드러지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윤설은 이 지독한 곰팡이를 도려낼 수 있을까요.


현실의 한계에 다다른 윤설의 시공간은 점차 현실과 꿈, 사후세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기묘한 영역으로 넘어갑니다. 『그루잠』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매끄럽게 허물어뜨립니다. 제목처럼 소설 속 세계는 깨어 있는 현실과 흐릿하게 겹쳐지는 영역을 오갑니다.





"다이어리를 품에 안았다.

그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을 느꼈다. 가슴 안쪽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끌려가는 느낌이었다.

이상한 건 그 느낌이 전혀 낯설지 않았다.

이미 한 번쯤, 아니 그보다 훨씬 이전에 겪어 본 듯한 기분.

분명 기억은 사라졌는데 사라졌다는 사실만은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공백 속에서 잊어서는 안 될 무엇인가가 나를 향해 조용히 외치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같은 말을 계속 반복해 왔던 것처럼.

절대로 잊지 말라고." _ p276


모든 기억이 지워진다한들 영혼의 지문처럼 깊이 새겨진 선의에 대한 기억이나 상처의 잔해는 완전히 청소되지 않습니다. 지워졌다는 그 사실 자체를 기억한다는 역설은, 인간이란 결국 인위적인 통제나 상처의 망각 속에서도 끝내 잃지 말아야 할 자아의 핵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조각난 감정과 기묘한 단서들을 더듬으며, 주인공 윤설과 함께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을 맞춰나가야 하는 『그루잠』. 현실의 불합리함을 관통하는 심리 묘사와 판타지 시스템의 기묘한 결합이 매력적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정은 남고, 장면은 왜곡되고, 중요한 사실은 오히려 잊혀집니다. 작가는 그 심리를 환상이라는 형태로 풀어냅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퍼즐이 맞춰질 때 기억을 되찾는 기분을 느끼게 됩니다.


기억과 용서, 죄책감과 희망을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구조 속에 녹여낸 『그루잠』은 결말을 아는 순간 다시 첫 장을 펼치게 되는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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