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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여성의 역사
최현미 지음 / 어크로스 / 2026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서점에서 원하는 책을 집어 들고, 전자책을 내려받고, 북클럽에 참여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독서는 누구에게나 허락된 권리가 아니었습니다. 특히 여성에게 책은 취미가 아니라 금기였고, 교양이 아니라 저항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책이라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의 중심에 우뚝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금기와 장벽을 넘어야 했을까요? 일간지 문화부 기자로서 문학과 출판의 최전선을 30여 년간 지켜보며 북 리뷰 팀장을 역임한 저널리스트 최현미 작가는 『읽는 여성의 역사』에서 여성 독자들의 흔적을 추적합니다.
여성사를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독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까지 확장합니다. 읽는 사람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결국 문명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최현미 작가는 여성의 읽기 역사가 두 개의 커다란 물줄기가 교차해온 역사라고 규정합니다. 여성의 독서를 금기시하고 위험시해왔던 막아서는 역사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통해 넓은 세계로 주체적으로 발을 디딘 나아가는 역사입니다.
인류 최초의 저작권자인 메소포타미아의 여사제 엔헤두안나부터, 배움을 위해 남장을 하고 대학교에 들어가 "학문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외친 폴란드 영주의 딸 나보이카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은 은밀하고도 치열하게 자신만의 텍스트를 탐닉하며 권리를 쟁취해 나갔습니다.

여성의 독서는 처음부터 혼자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중세 귀족 여성들조차 대부분 아버지가 읽어주는 걸 듣는 구술 독서에 머물렀습니다. 이 흐름을 바꾼 건 뜻밖에도 결혼 예물이었던 시간 기도서였습니다. 신앙이라는 안전한 명분 뒤에서 여성들은 처음으로 '내 속도로 읽는' 권리를 얻은 겁니다.
우리는 혼자 읽는 일을 너무 당연하게 여기지만, 역사 속 여성들에게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은 자기 생각을 갖는 시간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정해준 해석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따라 문장을 읽는 경험은 결국 자아를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버지니아 울프가 『자기만의 방』에서 공간을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그보다 앞서 '자기만의 독서 시간'이 먼저 탄생했음을 보여줍니다.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일이 사회를 흔드는 시작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상상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독서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읽는 사람은 질문하기 시작하고, 질문은 결국 기존 질서를 흔들기 때문입니다. 마녀사냥도, 여성 교육 금지도 결국 같은 맥락입니다. 독서를 막으려 했던 이유는 책 자체가 아니라, 책을 읽은 사람이 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통쾌한 대목은 1868년 뉴욕. 찰스 디킨스 초청 만찬에서 여기자들은 신사들 눈에 띄지 않도록 커튼 뒤에 앉아야 한다는 조건을 받았습니다. 이 굴욕에 맞서 제인 커닝엄 크롤리는 여성 전용 모임 소로시스를 만들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즐기는 북클럽, 독서 모임, 북토크의 원형이 실은 배제에 대한 분노에서 태어났다는 계보를 알게 됩니다.
『읽는 여성의 역사』에서 가장 낯설고 생생한 장면은 조선 후기 세책점 풍경입니다. 정약용이 부녀자들의 소설 열풍을 두고 다 모아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그 시절, 여성들은 살림살이를 담보로 잡아 책을 빌렸습니다. 담보물은 은비녀, 은장도, 은수저, 귀고리, 족두리, 담요, 접시는 물론 심지어는 요강, 귀이개, 타구까지 무엇이든 가능했다고 합니다.
조선 후기 여성 성리학자 임윤지당은 성별이라는 한계에 부딪혀 생전에는 온전한 평가를 받지 못할 것을 예견하면서도 불후의 기록을 남겼습니다. 죽은 뒤에라도 글이 장독이나 덮는 종이가 된다면 비감한 일일 것이라고 했던 그녀의 글은 다행히 장독대 덮개로 사라지지 않고, 사후에 문집 《윤지당유고》로 엮여 다음 세대 여성 지식인들에게 위대한 사상적 계보로 고스란히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수녀원, 시도서, 세책점, 살롱, 북클럽까지 저자는 여성이 읽기 위해 발명해낸 온갖 우회로를 추적하며, 막아서는 역사와 나아가는 역사가 동시에 진행됐다는 구조를 보여줍니다. 여성 독서사는 몰래 읽은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막히면 새 경로를 뚫는 실행력의 역사입니다.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여성 주인공의 등장 그리고 여성 독자의 확장은 오늘날 출판 시장과도 그대로 연결됩니다. 제인 오스틴이 초기에 'a lady(어느 숙녀)'라는 익명 뒤에 숨어 집필활동을 해야 했던 시대를 지나 점차 여성 작가, 여성 주인공, 여성 독자가 상호 긴밀하게 공명하는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20세기 폭력적인 외설 시비에 휘말렸던 제임스 조이스의 걸작 《율리시스》를 세상에 당당히 내놓은 주역 역시 실비아 비치, 마거릿 앤더슨, 해리엇 쇼 위버 같은 담대한 여성 출판인들이었습니다.
유튜브, 숏폼 콘텐츠,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긴 글을 깊이 있게 읽어내는 인지적 인내심이 붕괴되어 가는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성인 독서율이 낮은 현실 속에서 저자는 역설적이게도 다시금 여성 독자들의 힘에 강렬한 희망을 겁니다.
이미 한국의 여성 독서율은 남성을 앞지른 지 오래이며, 서점가의 베스트셀러를 발굴하고 전 세계에 한국 문학의 저력을 알리는 가장 든든한 아틀라스 역할을 해내고 있습니다.
『읽는 여성의 역사』는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억압과 장벽 속에서도 끈질기게 활자를 탐해온 세상 모든 불온하고 아름다운 독자들에게 바치는 경의입니다. 왜 우리가 여전히 깊이 읽기를 지속해야 하는지 일깨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