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향투 4 모암논선 4
이용수 지음 / 모암문고 The Moam Collection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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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개인 미술 컬렉션 모암문고에 소장된 소중한 유산들을 징검다리 삼아, 옛 성현들이 인생의 거대한 기로 앞에서 내렸던 치열한 선택과 그 선택이 남긴 정신적 유산을 생생하게 배달하는 『인정향투 4』. 


제목 인정향투(人靜香透)는 인적이 고요한데 향이 사무친다는 뜻으로, 이번 4편에서는 모암문고가 간직해 온 세 가지 위대한 작품을 통해 옛 현인들이 건네는 조용하지만 묵직한 울림을 전달합니다.





먼저, 첫 번째 작품 「서봉모운이강호십곡병(書奉茅雲李康灝十曲屛)」은 담원 정인보가 1943년 가을, 충청남도 논산에 거주하던 모운 이강호에게 선물한 10폭 병풍입니다. 1943년은 일제강점기 말기로, 민족의 말과 글은 물론이고 지식인들의 사상적 탄압이 최고조에 달했던 암흑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당대 최고의 국학자였던 정인보가 익산에서 논산까지 찾아가 모운 이강호와 3~4일 동안 머물며 회포를 풀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10폭 병풍에 담긴 시들을 분석하며, 당대 문인들의 교유 관계와 학풍의 이어짐을 추적합니다. 정인보가 읊은 시 속에서 세상 풍조가 점점 나빠진다는 고백은 민족의 혼이 말살당하는 시대적 비극에 대한 지식인의 뼈아픈 고뇌입니다.


정인보가 이강호에게 모운(茅雲)이라는 호를 지어주며 붓으로 찍었던 그 작은 먹점 하나에는, 친분을 넘어선 사상적 인연과 존중이 담겨 있습니다. 시대의 압제 속에서도 학문적 순수성을 지키며 상호 신뢰를 잃지 않았던 두 학자의 연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천재 예술가 추사 김정희의 화려한 글씨 이면에 숨겨진 실존적 고뇌와 공(空)의 미학을 보여주는 「반야심경연구원고(般若心經硏究原稿)」 편도 흥미롭습니다.


약 185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지본수묵의 원고는 정제된 완성작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추사가 『반야심경』의 구절들을 깊이 연구하고 고뇌하며 써 내려간 연구 원고입니다. 그렇기에 이 안에는 완성된 서첩에서는 볼 수 없는 추사라는 인간의 가감 없는 사유의 궤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저자는 공(空) 사상이라는 동양 철학의 정수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풀어냅니다. 불교의 '공'을 허무주의나 세상만사 부질없다는 식의 염세적 관점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추사가 인생의 황혼기에 유배 생활을 거치며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은, 권력도 명예도 육신도 결국 억겁의 시간 속에서는 찰나의 색(色)에 불과하며,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는 거대한 공(空)의 진리가 남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하곡 정제두가 정립하고 지켜온 양명학의 지행합일(知行合一) 학풍을 상속하고 실천한 강화학파의 태두, 영재 이건창의 「송동곡자전별사」를 다룹니다. 1881년, 격동하는 구한말의 정세 속에서 청나라로 길을 떠나는 벗 조인승을 위해 쓴 이 전별사는 단순한 석별의 정을 나눈 편지가 아닙니다.


강화학파의 학문적 뼈대는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하나이어야 한다'는 실천적 정의감에 있습니다. 이건창은 과거 자신의 조부인 이시원 선생이 병인양요 때 척화의 의리를 지키며 자결했던 가문의 엄숙한 학풍 속에서 자란 인물입니다. 그렇기에 그가 청나라라는 거대한 제국,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지정학적 소용돌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벗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긴장감과 염려가 가득합니다.





이건창은 벗에게 대국의 화려함에 현혹되거나 정치적 변화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스스로를 지키는 데 힘쓰라"고 조언합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세상의 유행에 흔들리지 않는 자아의 방어선을 어떻게 구축해야 하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그저 서화 해설서가 아니라 매 순간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 고뇌하고 선택하는 정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정인보와 이강호의 우정이 그러했고, 추사의 반야심경이 그러했으며, 이건창의 전별사가 그러했습니다. 옛 성현들이 남긴 묵흔 속 고요한 사유의 여정을 통해 우리의 다음 선택이 조금 더 아름답고 깊어지기를 전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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