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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박쥐 - 진화가 빚어낸 가장 다재다능한 생명의 비밀
요시 요벨 지음, 조은영 옮김 / 어크로스 / 2026년 6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박쥐는 억울한 동물입니다. 늘 음침한 동굴에 매달려 있는 존재로 등장하고, 바이러스의 상징이 되기도 했습니다. 날아다니는 쥐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천재 박쥐』를 읽고 나면 이런 인식이 얼마나 인간 중심적인 오해였는지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박쥐를 소개하는 동물 도감이 아닙니다. 인간의 지능과 문명, 사회성에 대한 고정관념을 해체하는 과학 탐사기입니다.
요시 요벨은 텔아비브대학교 동물학과 및 신경과학대학원 교수이자 세계적인 박쥐 연구 권위자입니다. 생태학과 신경과학을 결합한 신경생태학 분야를 개척하며 박쥐의 감각과 행동을 연구해 왔습니다. 초소형 GPS와 생체 센서를 직접 개발해 야생 박쥐의 삶을 추적해온 연구자로 유명합니다.
『천재 박쥐(The Genius Bat)』는 2023년 번스타인 논픽션상을 수상하며 과학 대중서로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박쥐 자체만큼이나 박쥐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다루고 있어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밀림과 동굴, 사막과 화석 발굴 현장을 누비는 탐험 다큐멘터리 속에 들어간 듯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우리가 감탄을 보내는 동물의 능력은 언제나 인간의 행동을 얼마나 잘 모방하느냐를 기준으로 측정되었습니다. 이 기준은 근본적으로 오만합니다.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감각의 영역에서, 수천만 년에 걸쳐 진화가 빚어낸 전혀 다른 형태의 천재성이 존재한다면 어떨까요?
전 세계 포유류의 20퍼센트를 차지하며 1,500여 종으로 분화된 박쥐라는 생명체를 통해 저자는 결국 진화란 무엇인지, 지능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천재성이라고 부르는 것의 정의 자체를 다시 묻습니다.
흡혈박쥐의 사회성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입니다. 진화생물학의 오랜 가정 중 하나는 이타적 행동이 결국 유전자 전파의 이익으로 환원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리처드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에서 제시한 틀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흡혈박쥐는 이 틀이 얼마나 좁은지를 보여줍니다.
흡혈박쥐는 사흘만 굶어도 죽는다고 합니다. 매일 밤 사냥에 나서야 하는 이들에게 실패는 곧 죽음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굶주린 동료가 생기면 자신이 마신 피를 게워 내어 나눈다고 합니다. 놀라운 점은 혈연관계가 없는 개체들 사이에서도 이 나눔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더욱이 이들은 누가 자신을 도왔는지를 수십 년 단위로 기억하며, 이전에 베풀어준 개체에게 우선적으로 피를 내어준다고 합니다.
저자는 서로 멀리 떨어진 군락에 살아서 안면이 없는 박쥐들을 한 사육장 안에 넣는 실험을 합니다. 낯선 개체들이 함께 생활하는 시간이 쌓이면서 점차 신뢰를 형성하고, 그 신뢰가 피를 나누는 행동으로 이어진다는 발견은 인간 사회의 사회적 계약 이론과 놀라울 만큼 공명합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일명 사기꾼 전략이 있습니다. 받기만 하고 베풀지 않는 개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정체가 드러나 결국 군락 전체에서 외면당한 겁니다. 박쥐 군락에도 의리와 손절이 있다는 발견은 도덕적 직관이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박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능력, 반향정위(Echolocation)를 다룹니다. 입이나 코로 초음파를 발사하고 물체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음파를 분석해 3차원 공간을 지각하는 이 시스템은 인간이 개발한 어떤 레이더나 소나보다 정교합니다.
반향정위에 관한 학문적 논쟁의 역사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저자는 반향정위가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과학자들이 오랫동안 믿지 않으려 했던 발견이었음을 들려줍니다.
박쥐는 공간을 거리(미터)로 인식하지 않고 음파가 왕복하는 시간(밀리초)으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같은 세계에 살면서도 전혀 다른 인식 체계로 그 세계를 경험하는 생명체가 있다는 것, 철학자 토마스 네이글이 제기한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습니다.
박쥐와 곤충의 음파 군비 경쟁은 포식자와 피식자 사이의 오랜 공진화의 산물입니다. 박쥐와 풀잠자리의 추격신을 박진감 있게 다룬 운명의 100밀리초 드라마를 읽고 나면 수백만 년의 진화가 죽느냐 사느냐를 결정하는 찰나에 담겨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박쥐 진화를 둘러싼 미해결 논쟁에 대해서도 다룹니다. 비행 능력이 먼저인가, 반향정위 능력이 먼저인가는 고생물학, 비교해부학, 분자유전학이 각기 다른 증언을 내놓으며 수십 년째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발견된 '오니코닉테리스 핀네이' 화석을 둘러싼 논쟁은 과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달팽이관의 크기, 목의 경상설골 뼈 구조 등 부서지고 납작해진 화석 속에서 수억 년 전의 비밀을 읽어내려는 연구자들의 핑퐁 게임은 마치 범인의 알리바이를 검증하는 법정 드라마처럼 전개됩니다.
저자는 '박쥐는 날아다니는 쥐'라는 오랜 통념이 현대 DNA 분석에 의해 완전히 뒤집혔음을 밝히기도 합니다. 박쥐는 설치류(쥐)나 영장류(원숭이)가 아니라 개, 고양이 같은 식육목이나 소, 말 같은 유제류에 더 가까운 포유류입니다.
박쥐는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공포의 숙주로 낙인찍혔습니다. 하지만 박쥐는 하룻밤에 수천 마리의 모기와 농작물 해충을 포식하며 연간 수십억 달러의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고, 수백 그루의 나무 위치를 기억하여 수분을 돕는 생태계의 핵심 노드라고 합니다.
친환경 에너지의 상징인 풍력발전 터빈에 부딪혀 매년 수백만 마리의 박쥐가 폐사합니다. 기후 위기를 막으려는 선의가 다른 생태적 위기를 가속화하는 이 역설은 환경 문제가 단일한 해결책으로 수렴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을 직면하게 만듭니다.
인간의 이동 경로를 통해 대륙을 건너 번진 치명적인 진균 질병인 '흰코증후군(White-nose syndrome)'은 동면 중인 박쥐들을 강제로 깨워 굶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 미국 내 작은갈색박쥐의 개체수가 무려 90퍼센트나 급감하는 대참사가 일어났습니다.
2024년 〈사이언스〉에 게재된 연구에 따르면, 흰코증후군으로 박쥐 군락이 파괴된 지역의 농가들은 해충을 막기 위해 살충제 사용량을 31퍼센트나 늘렸고, 그 결과 독성 물질의 유출로 인해 해당 지역의 유아 사망률이 8퍼센트나 증가하는 끔찍한 연쇄반응이 일어났습니다. 박쥐의 절멸은 박쥐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생태계는 관계의 네트워크이며, 인간도 그 네트워크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시 요벨 교수는 인간과 박쥐가 공존할 수 있는 실천적 희망의 단서들을 현장에서 길어 올립니다. 도심의 다리 밑, 콘크리트 틈새를 쉼터 삼아 살아가는 박쥐들은 인간의 소음과 문명에 그들만의 방식으로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현장 과학자들의 좌충우돌 탐험기를 통해 지식이 만들어지는 날것의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천재 박쥐』. 1,500종 박쥐의 경이로운 우주와 진화의 미스터리를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