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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야 놀자
김선규 외 지음 / 문학고을 / 2026년 5월
평점 :

*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문학고을 강원지부 동인들이 엮어낸 『감자야 놀자』. 강원도와 감자라는 시각적 기표가 주는 선입견을 가지고 읽는다면 깜짝 놀랄 겁니다. 향토적인 서정을 노래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영혼의 허기짐을 앓고 있는 고독한 현대인들 특히 오늘날의 청춘들에게 무척이나 유효한 생의 지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각기 다른 삶의 궤적을 그리던 아홉 명의 문우들 (김수진, 신기순, 김선규, 달빛바람, 정우연, 유영숙, 윤장은, 주진복, 유영준)이 각자의 삶에서 채취한 원료들을 이 책 한 권에 모아냈습니다. 시, 수필, 단편소설을 가로지르는 이 동인지는 지금도 익어가는 사람들의 기록에 가깝습니다.
김수진 작가의 작품은 일상의 풍경을 세심하게 포착합니다. 시 「소나무」는 그 진수를 보여줍니다. "살아살아 살아진다. / 푸른 잎새 늘 그 자리 / 등껍질 벗긴 자리 솔방울 떨어지면 / 하늘 향한 굳은 신념 / 살아짐에 순응한다."
살아살아 살아진다라는 시어가 참 좋습니다. 가만히 소리 내어 읊조릴 때의 그 맛이 남다릅니다. 눈으로 읽을 때보다 입술과 혀를 거쳐 귀로 들을 때 비로소 그 진가가 발휘되는 참 근사한 시어입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 악착같이 버텨내는 '살아'라는 능동의 외침이 반복되다가 세상의 흐름에 몸을 툭 맡겨버리는 '살아진다'라는 수동의 울림으로 끝맺음합니다. 그저 존재 자체로 살아냄을 보여줄 뿐입니다. 억지로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짐에 몸을 맡기는 것, 이것이 강원의 자연이 가르쳐 준 지혜인지도 모릅니다.

신기순 작가의 시 「계란 한 판」은 사회적 시선을 담은 작품 중 하나입니다. "미끄러운 길보다 / 미끄러울까 봐 더 조심스러운 것은 / 그 하루의 끼니일지도 모르겠다"
등 굽은 할아버지가 왼손에는 지팡이, 오른손에는 계란 한 판을 들고 걷습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계란들이 서로를 끌어안는다는 표현이 빛납니다. 넘어질까 봐 두려운 것이 아니라 끼니를 놓칠까 봐 두려운 노인의 하루. 문학의 언어로 짚어내니 더 애잔하게 다가옵니다.
동인지 발간사를 쓴 김선규 작가의 「총알과 사랑의 상관관계相關關係」는 오발탄-불발탄-연발탄의 3부 구조로 사랑의 방식을 해부합니다. "내가 그의 심장을 향해 쏜 총이 / 그의 머리카락을 스치듯 지나갔다 / 아무 일도 없는 조용한 침묵 / 오발된 총알은 어디에서도 / 찾을 수 없고 그는 떠나갔다"
사랑을 총알의 물리학으로 설명하는 발상이 낯설고도 정확합니다. 닿지 못한 사랑(오발탄), 터지지 않은 사랑(불발탄), 방탄복을 뚫지 못한 사랑(연발탄). 실패의 양태는 사랑이 언제나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필명 달빛바람의 시는 유머를 머금고 있습니다. 「방귀들의 대화」, 「T의 표현법」, 「배고픈 숟가락」처럼 웃음 속에 삶의 결핍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어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독과 결핍을 억지로 포장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 쓸쓸함의 실체를 투명하게 대면하게 만듭니다. 「바람」에서의 "아픔 도둑 / 세월 도둑"이라는 극도로 압축된 두 행짜리 시구도 매력적입니다.
정우연 작가의 「목련」은 가슴 아린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시대의 한파 앞에서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스러지는 청춘들의 좌절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봄볕에 취해 / 철모르고 피어"났으나, 세상은 여전히 "겨울 같은 바람"으로 가득 차 있기에 꽃잎은 아리게 멍들고 맙니다. "빛을 잃은 날 / 꿈을 잃고 / 다시는 보지 못할 / 고운 봄을 잃었다"라는 가슴 시린 이야기. 저마다의 마음속에 묻어둔 잃어버린 봄을 생각나게 합니다.

유영숙 작가의 「저온 저장고」는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에 대한 탁월한 은유가 빛납니다. "나도 기억 저장고를 만들고자 한다 / 사시사철 기억 저장고를 들어가 / 돌풍과 폭우로 당혹스러웠던 이별의 날들을 / 차곡차곡 경험으로 빚어 / 저장고에 넣어두고자 한다"라며 상처를 잊으려 하지 않고 저온 저장하겠다는 선택, 이별을 경험으로 빚어 저장하겠다는 태도에서 삶에 대한 단단한 성숙이 느껴집니다.
윤장은 작가의 작품들은 이 동인지에서 가장 긴 호흡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로움과 허기짐을 착각해서」와 함께 「사람이… 그리웁다」 등은 한 편의 소설처럼 전개됩니다. 현대인들이 겪는 고질적인 정신적 질환인 소외와 공허를 재구성해 냅니다.
주진복 작가의 「자기 삶에 대한 예의」에서는 "대충 살아도 된다고 하지만 / 그 말 뒤에 숨은 쓸쓸함 / 한 번뿐인 인생 / 조금 더 따뜻하게 / 진심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문장이 와닿습니다. 허무주의와 무기력증에 빠진 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입니다.
마지막 주자 유영준 작가는 수필과 단편소설로 이 동인지의 문을 닫습니다. 수필 「소설을 써야 하는 변명」에서 "오늘은 내가 왜 소설을 쓰는지 그 고집스러운 내막과 변명을 늘어놓고자 한다. 굳이 왜 '소설' 이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라며 운을 뗍니다.

시에서 수필로, 수필에서 소설로 장르를 넘나든 이력은 언어에 대한 끝없는 갈증의 산물입니다. 그리고 단편소설 「환상방황環狀彷徨」을 선보입니다. 동인지 안에서 비교적 실험적인 작품인데, 그래서 더 기억에 남습니다.
분명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지만, 안개가 걷히고 나면 늘 제자리인 것만 같은 청춘들의 불안감과 좌절감이 투영되어 있습니다. 삶이란 결국 제자리걸음인지, 아니면 계속 맴돌며 다른 사람이 되어가는 과정인지 질문하게 만듭니다.
중장년층 독자에게는 자신의 기억과 공명하는 시어들이 풍부하게 담겨 있고, 젊은 청년층 독자에게는 세대 너머의 감각을 날것으로 경험할 기회가 됩니다. 거창한 문학이 아닌, 삶의 틈새에서 피어난 언어들이 얼마나 깊이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입니다. 삶에 지친 밤, 밥 냄새 같은 시와 수필이 필요하다면 『감자야 놀자』를 펼쳐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