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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벤 존슨
이찬란 지음 / 시원북스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가 잊고 지냈던 다정한 참견의 가치를 이야기하는 이찬란 작가의 장편소설 『나의 벤 존슨』. 스스로를 1988년 서울 올림픽의 비운의 스타 벤 존슨이라 믿는 한 중년 남자와 월세 낼 돈이 없어 고시원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 호달의 기묘한 동행 속으로 들어갑니다.
마흔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 쓰는 사람이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해 오랜 꿈을 이루기 위해 독립을 선택한 이찬란 작가의 삶 자체가 어쩌면 이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경로 이탈과 새로운 시작의 생생한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100미터 결승전이라는 강렬한 역사적 순간에서 출발하는 이야기는 2020년대 서울 신림동 고시촌, 이제는 고시생보다 빈민에 가까운 일용직 노동자가 더 많아진 그곳으로 이어집니다.
주인공 호달에게 신림동은 꿈의 요람이 아니라 생존의 사선입니다. 밤샘 알바를 마치고 돌아온 그를 맞이하는 건 버려진 법률 책 묶음뿐입니다. 더 이상 희망을 품을 수 없는 구조가 된 고시촌의 현실을 묘사합니다.
세계신기록 9초 79를 세우고도 단 72시간 만에 약물 복용으로 금메달을 박탈당한 벤 존슨. 그 이름을 자신의 것으로 믿는 정체불명의 남자와 보증금 한 푼 없이 고시원에서조차 쫓겨날 위기에 처한 청년 호달이 만납니다. 소설은 이들의 만남을 실패한 자들이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결핍의 조우로 그려냅니다.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고, 선을 지키고, 타인의 고통에 공감은 하되 개입하지 않는 태도가 사회관계의 방식이 된 시대. 호달이 겪는 고립은 휴대폰이 꺼지는 순간 완벽한 어둠이 되는 현대인의 초상입니다.
정작 마음 둘 곳 없는 호달에게, 벤 존슨 남자는 무례할 정도로 참견하고 훈수를 둡니다. 국수 한 그릇을 같이 먹고, 빈 지갑의 서러움을 공유하며, 심지어 밀린 월급을 받기 위해 피시방을 습격하는 무모한 여정에 호달을 끌어들입니다. 이 남자가 조력자인지 사기꾼인지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호달은 난생처음 누군가 내 옆에 있다는 감각을 깨닫습니다. 호달의 모습은 현대 사회의 세련된 고립보다 과거의 촌스러운 연대가 얼마나 더 인간을 살게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무례함 속에 숨겨진 낡은 애정이 어떻게 개인을 구원하는지, 타인에 대한 관심이 실은 우리가 이 세계에 흩뿌려놓아야 할 소중한 씨앗임을 일깨워줍니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벤 존슨은 승리자가 아닌, 추락한 영웅의 대명사입니다. 경이로운 기록 뒤에 숨겨진 약물 복용의 얼룩. 하지만 남자는 그 추락의 기억마저 자신의 정체성으로 안고 살아갑니다. 실패한 영웅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삼는다는 것은 실패했어도 그 질주 자체가 의미 있었다는 믿음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패배하기로 결심하지 않는 한, 패배의 법칙 같은 건 없어야 했다."라는 문장이 오래 머뭅니다. 책을 덮는 순간까지도 호달의 인생이 펴질거라는 장담은 솔직히 하기 힘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심하지 않는 한'이라는 조건절이 주는 위로가 상당히 큽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달릴 이유가 되어줍니다.
둘의 동행, 독특합니다.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지는 않습니다. 대신 결핍을 가진 채로 함께 달립니다. 그게 이 소설이 말하는 연대의 방식입니다. 귀찮고 불편합니다. 하지만 함께 달리는 과정에서 얻은 가족 같은 온기가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완벽하지 않은 두 주인공이 서로의 페이스메이커가 되어주는 과정을 통해 나의 실패 또한 인생이라는 긴 트랙의 일부임을 깨닫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