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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풍경
마치에이 미크노 지음, 발렌티나 고타르디 그림, 김시형 옮김 / 모스그린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풍경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명소, 절경이나 그림엽서 속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발 그림책 『우리가 사는 풍경』 속 풍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형식은 어린이 그림책이지만, 꽤 철학적입니다. "풍경은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필요한 인식론적 전환일지도 모릅니다.
이탈리아의 생태 전문 출판사 코카이 북스를 이끄는 저자 마치에이 미흐노(Maciej Michno)와 일러스트레이터 발렌티나 고타르디(Valentina Gottardi)는 눈에 보이는 경치를 넘어, 인간과 환경이 서로를 빚어가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을 포착해냅니다.
출근길의 가로수, 창밖으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 점심시간에 잠깐 들르는 공원. 우리는 매일 풍경 속을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얼마나 제대로 인식하고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자면 풍경을 배경으로 처리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풍경』은 풍경이 정지된 화면이 아니라 경험의 총체임을 짚어줍니다. 풍경은 바람의 결, 흙의 냄새, 길 위에서 마주치는 이웃의 인사말까지 포함하는 입체적인 개념인 겁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움직이고 호흡할 때 비로소 풍경은 완성됩니다. 고정된 이미지가 아니라 우리의 삶이 투영된 생생한 현장입니다.
풍경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것이라는 관점 전환이 핵심입니다. 같은 장소라도 경험의 층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으로 재구성됩니다. 풍경은 있는 그대로의 상태가 아니라 해석되는 방식에 의해 형성됩니다.
풍경을 찾기 위해 먼 곳으로 떠나야 할까요? 저자는 발밑을 보라고 합니다. 매일 걷는 보도블록 사이의 틈새, 익숙한 아파트 단지의 나무 한 그루조차도 풍경의 당당한 주인공입니다.
우리가 태어나 자란 곳의 모양, 빛, 소리, 냄새조차 우리 기억 속에 영원히 남아 우리를 형성합니다. 저자는 우리가 자란 동네의 언어가 우리에게 사유의 기초를 제공하듯, 주변의 모든 환경이 우리 삶의 든든한 길잡이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어린이 그림책에서 이 정도 밀도의 생태철학을 만나는 건 드문 일입니다. 팽나무의 생태 특성을 세밀하게 설명하는 일러스트, 민들레의 뿌리 구조를 보여주는 식물도해까지 고타르디의 그림은 구체적 생명체의 언어로 번역해 냅니다. 인물들은 주로 선 드로잉으로 처리되어 배경의 자연과 대비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버려진 땅, 아스팔트 틈새, 담장 가장자리에서 씩씩하게 자라나는 식물들. 효율과 정돈을 추구하는 현대 도시에서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이 틈새입니다.
생태학적으로 보면 경계 지점과 틈새야말로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공간입니다. 우리가 잡초라 부르며 뽑아버리던 것들이 사실은 도시의 열기를 조절하고, 토양을 지탱하며, 곤충들의 서식지가 되어주는 존재라는 사실을 식물 일러스트와 함께 보여줍니다.
『우리가 사는 풍경』은 사라지는 풍경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줍니다. 블랜드스케이프(Blandscape)라는 신조어가 눈에 띕니다. bland(심심하다)와 landscape(풍경)를 합친 이 단어를 통해 잔디밭과 꽃밭, 획일적인 나무 울타리로만 채워진 공간이 얼마나 생태적으로 빈곤한지를 짚어줍니다. 보기에 깔끔한 곳이 실은 가장 생명력 없는 곳일 수 있다는 역설은 우리 주변의 흔한 건물들의 조경을 떠올리게 됩니다.
풍경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존재이며, 그 변화의 주체가 바로 우리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작은 행동 하나가 풍경을 바꿀 수 있습니다. 쓰레기를 줍는 행동, 나무를 심는 행동 또는 어떤 장소를 소중히 대하는 태도까지 이런 일상적인 선택들이 모여 풍경의 질을 결정합니다. 환경 보호를 의무로 강요하기보다, 참여의 기쁨으로 전달하는 책입니다.
어려운 낱말 풀이 파트에서는 핵심 키워드들을 다시 한번 정리해줍니다. 환경, 풍경, 관계 등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의 뜻을 명확히 이해하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사는 풍경』은 풍경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라, 풍경을 다시 보게 만드는 책입니다. 매일 지나치는 공간들이 얼마나 많은 이야기와 관계를 품고 있는지를 깨닫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