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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 : 6가지 우회적 성찰
슬라보예 지젝 지음, 이현우 외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폭력을 눈앞에서 벌어지는 선명한 사건, 즉 누군가 주먹을 휘두르거나 테러가 발생하는 주관적 폭력으로만 인식합니다.
하지만 『폭력: 6가지 우회적 성찰』(원제 Violence: Six Sideways Reflections) 은 다른 시선을 요구합니다. 지젝은 폭력의 현장에서 한 걸음 물러나 비스듬히 바라볼 때, 오히려 우리 체제를 지탱하는 거대한 객관적·구조적 폭력을 선명히 포착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소개가 필요 없는 인물입니다. 슬로베니아 출신의 철학자이자 문화이론가인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 헤겔의 변증법,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을 종횡무진 넘나들며 현대 자본주의와 이데올로기의 작동 방식을 해부해 온 세계에서 가장 도발적인 지식인 중 한 명입니다.
2008년에 펴낸 Violence: Six Sideways Reflections가 2026년 한국어 전면 개역판으로 새롭게 출간됐습니다. Sideways—우회적으로, 비스듬히. 왜 지젝은 폭력을 정면으로 보지 않겠다고 선언할까요? 폭력을 정면으로만 응시할 때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놓치기 때문입니다.
지젝은 폭력을 세 가지 유형으로 구별합니다. 첫째는 주관적 폭력, 우리가 일상적으로 폭력이라고 부르는 물리적 행위입니다. 둘째는 상징적 폭력으로 언어와 이데올로기에 깊이 박혀 있어 눈에 잘 띄지 않는 폭력입니다. 셋째는 구조적 폭력으로 경제·정치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바로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폭력입니다.

뉴스를 보며 분개하는 테러나 범죄, 전쟁의 잔혹함은 주관적 폭력입니다. 그것은 사실 폭력이라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진짜 문제는 수면 아래에 잠겨 있는 구조적·상징적 폭력이며, 아이러니하게도 우리의 주관적 폭력에 대한 분노 자체가 그 구조를 은폐하는 기제로 작동한다고 합니다.
『폭력: 6가지 우회적 성찰』은 이 세 가지 방식의 폭력이 복잡하게 벌이는 상호작용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폭력(주관적 폭력)은 이미 작동 중인 상징적·구조적 폭력의 표면적 증상입니다.
특히 관용과 이데올로기 이면에 숨은 이야기들이 흥미진진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가 아니라 '이웃을 두려워하라'. 지젝은 여기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타자 윤리학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레비나스에게 이웃이란 "전혀 헤아릴 수 없는 타자로서, 무조건적인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숭고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지젝은 이 헤아릴 수 없는 타자가 나와 소통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사물로서의 괴물성을 드러내는 순간, 레비나스의 아름다운 윤리는 무력해진다고 짚어줍니다.
즉, 타자가 더 이상 존중받는 대화 상대가 아니라 이해의 영역을 넘어선 절대적 타자가 될 때, 우리는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두려워하며 거리 두게 된다는 것입니다. 레비나스식의 무조건적인 환대와 사랑이 현실의 끔찍한 타자 앞에서는 불가능해집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부르고 분류하는 방식, 즉 언어의 폭력은 관용의 가면 뒤에 숨어 있습니다. 다문화주의적 관용이 말하는 '열린 태도'는 사실 우리에게 무해한 타자만을 허용한다는 선언입니다. 나의 질서를 뒤흔드는 '진짜 타자' 앞에서 관용은 순식간에 혐오로 뒤집히고 맙니다. 결국 관용이란 타자가 철저히 우리를 닮아갈 때만 유효한 조건부 계약일 뿐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다문화 정책은 존중과 공존을 강조합니다. 공공기관 캠페인이나 교육에서도 다름을 인정하자는 메시지가 반복됩니다. 표면적으로는 매우 바람직한 방향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현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 관용이 실제로는 거리 유지의 방식으로 작동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결혼이주여성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정책은 적응과 관리에 초점을 맞춥니다. 이들은 이해해야 할 대상이지만, 동시에 우리와는 다른 존재로 계속 규정됩니다.
저도 그동안 타자에 대한 존중은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고, 불결하지 않으며, 위험하지 않은' 무해한 상태일 때만 유효했던 것 같습니다. 내 입맛에 맞게 가공된 타자만을 수용해 온 셈입니다. 이 책은 나를 둘러싼 가짜 관용의 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처럼 보이는 관용 담론이 실제로는 정치·경제적 문제를 문화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탈정치화 전략이라는 점에 공감합니다. 정치의 문화화라고 부르는 이 과정에서 빈곤과 불평등이라는 구조적 문제는 문화적 차이의 갈등으로 위장됩니다. 관용은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지젝은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사실 강요된 선택에 불과하다고 일갈합니다. 체제는 우리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는 척하지만, 실상은 '올바른 답'을 고를 때만 그 자유를 승인합니다. 자비의 가면을 쓰고 자발적 복종을 설계하는 이 교묘한 메커니즘이야말로 지젝이 폭로하고자 하는 상징적·구조적 폭력의 정수입니다.
앞선 세 가지 폭력이 모두 동일한 질서 안에서 작동하는 서로 다른 층위의 폭력이라면, 이 구조를 끊어낼 수 있을까요? 신적 폭력은 바로 그 질문을 위한 개념입니다. 폭력을 없애려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폭력의 형태만 바꾸고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줍니다. 신적 폭력은 질서의 작동방식을 끊는 폭력입니다.
우리는 무조건적인 용서를 선(善)으로 여기지만, 지젝은 오히려 아무나 용서를 남발하는 것이 얼마나 오만한 일인지 영화 <도그빌>의 사례로 보여줍니다. 지젝은 범죄의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니면서 타인의 죄를 너그럽게 사하여 줄 권리가 있는가라고 반문합니다.
그것은 용서가 아니라 자신의 도덕적 우월함을 뽐내려는 권력 놀이일 뿐이라는 걸 짚어줍니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것은 용서냐 처벌이냐의 선택이 아닙니다. 지젝이 겨냥하는 것은 그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도덕적·사회적 틀 자체입니다. 신적 폭력은 바로 그 틀을 넘어서는 개념입니다. 용서와 처벌이라는 익숙한 윤리적 좌표를 무력화시키며 우리가 당연하게 여겨온 선과 악의 경계를 근본에서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폭력을 사건이 아닌 구조이자 체제로 읽어내는 『폭력: 6가지 우회적 성찰』. 주관적 폭력 너머의 객관적 폭력을 분석하고, 언어 자체가 가진 폭력성을 탐구하고,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위선을 파헤치고, 보편성 뒤에 숨은 권력을 분석하며 체제의 회로를 끊어내는 가능성을 모색합니다.
읽는 내내 오늘날 한국 사회의 모순과 깊게 맞닿아 있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겉으로 평온하고 치안이 좋은 사회에 살고 있지만 이 매끄러운 체제 뒤에는 플랫폼 노동자의 과로사나 청년 고독사 같은 구조적 폭력이 흐르고 있습니다. 인도주의의 탈을 쓰고 이러한 구조적 폭력에 기여하는 자유주의적 좌파의 위선을 꼬집은 지젝의 문장들이 비수처럼 꽂힙니다.
또한, 비극적인 사건이 터질 때마다 가해자 개인에게만 모든 분노를 쏟아붓는(주관적 폭력에 집중하는) 행위가 어쩌면 그 비극을 낳은 거대한 경제적·정치적 시스템(상징적·구조적 폭력)을 보지 않기 위한 회피가 아니었는지 성찰하게 됩니다.
세상이 비극과 폭력으로 가득 찰 때, 성급하게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는 요구에 응하지 말라는 지젝. 우리가 내놓는 대부분의 해결책은 기존의 폭력적인 시스템 안에서 허용된 방식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가짜 도덕의 사슬을 끊어내는 결단만이 진짜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지젝의 질문은 불편하지만 피할 수 없습니다. 그 불편함 속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인식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지젝이 제안하는 해결책은 성급한 행동이 아니라 침착한 사유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행동은 시스템의 회로를 멈추게 하는 생각하기, 즉 사유 그 자체인 겁니다. 6가지 우회로를 통과하고 나면 우리는 비로소 폭력이라는 단어의 진짜 무게를 감당할 준비를 마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