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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타이거
브래드 류.줄리아 류 지음, 박미연 옮김 / 트로이목마 / 2026년 4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브래드 류와 줄리아 류, 한인 3세 남매가 내놓은 『라스트 타이거(The Last Tiger)』. 표지부터 예술 작품입니다. 강렬한 눈빛과 금빛 드로잉의 조화는 K-판타지의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뉴욕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며 서사의 뼈대를 세운 브래드와 유튜브 1,600만 뷰의 신화 '심청전 Dive'로 전 세계의 영혼을 울린 줄리아가 함께 쓴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할아버지의 유언으로부터 탄생되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암흑의 터널을 지나 6.25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조부모님의 운명적인 사랑, 그리고 1960년대 미국 이민이라는 거대한 전환점을 통과한 실재하는 역사가 판타지 서사의 뿌리입니다.
한때 한국적 정서는 번역하기 어려운 감정으로 불리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정(情), 눈치, 한(恨)이라는 단어조차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되는 시대입니다. 『라스트 타이거』는 한국적 감정의 핵심을 붙잡아 서양식 판타지 문법으로 다시 빚어낸 멋진 소설입니다.
이 소설의 출발점이 상상이 아니라 기억이라는 점 때문에 『라스트 타이거』는 단순한 역사소설도, 로맨스도 아닌, 감정과 상징이 교차하는 정서적 판타지로 자리 잡습니다.

호랑이 왕국과 드래곤 제국의 격돌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소설의 첫 문을 여는 키워드는 정(情)입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알지만, 명쾌하게 번역하기 어려운 이 오묘한 단어를 작가들은 판타지적 설정인 호랑이 왕국의 정서적 토대로 만들었습니다.
판타지라는 가상의 공간을 유영하면서도, 그것이 실재했던 고통의 변주임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됩니다. 승의 시점에서 묘사되는 도살 의식은 일제의 수탈을 은유하는 듯해 가슴을 먹먹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정'은 사랑하는 연인 사이의 감정을 넘어, 공동체가 겪는 비극을 함께 견뎌내는 함께함의 에너지로 작용합니다. 승과 은지의 시점으로 번갈아 배치하며, 서로 다른 계급과 상황에 놓인 두 인물이 어떻게 '정'이라는 끈으로 연결되는지를 묘사합니다.
로맨스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접촉조차 전혀 다른 결을 띱니다. 단순한 설렘이 아니라,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감각의 증명으로 작용합니다. 역사 속에서 흔들리는 개인들이 서로를 붙잡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은 관계를 설명하는 감정이 아니라, 세계를 유지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2부 눈치에서는 서사의 텐션이 올라갑니다. '눈치'는 한국인에게는 사회적 지능의 상징이지만, 식민지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는 목숨을 보전하기 위한 절박한 레이더망이 됩니다. 드래곤 제국의 감시 아래 호랑이의 기개를 숨긴 채 살아가는 이들의 심리전은 웬만한 스릴러 영화보다 쫄깃합니다.
작가는 실제 할아버지의 기록을 빌려 당시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역사적 사실은 소설 속에서 드래곤 제국의 철권통치로 나타납니다. 은지는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승은 자신의 힘을 갈무리합니다. 하지만 그 숨 막히는 긴장감 속에서도 사랑은 피어납니다. 아니, 오히려 억압받기에 그 사랑은 더 찬란하고 위험해집니다.
이들의 풋사랑 앞에는 현실이라는 거대한 벽이 버티고 서 있습니다.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시대는 개인의 욕망보다 가족의 생존과 민족의 대의를 우선시하게 만듭니다. 소설은 하이틴 로맨스를 넘어, 시대와 불화하는 개인의 고뇌를 깊이 있게 다룹니다.
드디어 3부, 한국 서사의 정점인 한(恨)의 단계입니다. 이 소설에서 '한'은 폭발하기 직전의 응축된 에너지이자 불의에 항거하는 불굴의 의지입니다. 멸종된 줄 알았던 호랑이가 다시 포효하고, 흩어졌던 마음들이 모여 제국의 심장을 겨눕니다.
소설 속에서 호랑이의 멸종은 곧 민족 혼의 상실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라스트 타이거'는 존재했습니다.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처럼 시각적인 묘사가 압권입니다. 압도적인 스케일의 전투와 희생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한'은 비극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씨앗이 됩니다.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비극적 역사를 승리와 희생의 서사로 재창조해 냅니다. 상상력이라는 도구를 빌려 선조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그들의 용기를 현재로 소환합니다.
『라스트 타이거』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격언을 증명합니다. 한인 3세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었을 남매가 할아버지의 빛바랜 일기장에서 발견한 것은 가문의 역사가 아니라 인류 공통의 가치인 자유와 사랑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라는 실존적 무게감과 드래곤, 호랑이라는 판타지적 상상력이 충돌하며 만들어내는 스파크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더불어 힙한 감성 속에 녹아있는 '정, 눈치, 한'의 철학적 의미를 흥미진진한 서사로 만나봅니다. K-로맨스의 새로운 기준이 된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