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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씨앗대로 산다 - 갖가지 콩이 가르쳐 준 다양성과 삶의 지혜
문홍현경 지음 / 니은기역 / 2026년 3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앙증맞게 작고 투박하지만, 그 속에 담긴 폭발력은 결코 작지 않은 책, 문홍현경 작가의 그림 에세이 『자기 씨앗대로 산다』.
우리는 어제의 나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지만, 정작 그 '나음'의 기준을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에 맞추느라 자신의 고유한 색깔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자급하는 삶을 실천하며 생태활동가로 살아가는 저자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콩 한 알도 이토록 제각각인데, 왜 당신은 남과 똑같아지려 애쓰느냐고 말이죠.

『자기 씨앗대로 산다』는 스물아홉 가지 토종 콩의 얼굴을 빌려 우리 삶의 주권을 회복하라는 다정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우리는 마트에서 매끈하고 일정한 모양의 콩만을 만납니다. 하지만 저자가 만난 토종 콩의 세계는 불규칙함 그 자체였습니다.
할머니는 노란콩을 늘 메주콩이라고 부르셨기에 여태껏 당연히 노란콩을 메주콩인 줄 알고 살았다는 작가. 저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메주콩이 어떤 특정한 한 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메주를 쓸 때 쓰는 콩들을 메주콩으로 부른다고 합니다.
생태계의 순환을 몸소 체험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단한 근육이 느껴집니다. 서리태의 검은 껍질 속에 감춰진 초록빛 속살을 보며, 나이 듦에 따라 변해가는 자신의 머리카락 색깔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유를 보여줍니다.
콩의 다양성을 찬양하면서 그 콩들이 자라날 기반에 대해 고민하기도 합니다. 콩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곧 그 생명이 발을 딛고 있는 기후와 문화를 지키는 일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계속 뜨거운 날이 늘고, 비 오는 날이 너무 늘거나 너무 줄면, 장을 담그는 삶을 일컫는 이름씨와 움직씨들이 사라질 것만 같다고 말입니다. 기후위기는 추상적인 데이터가 아니라, 우리 식탁 위에서 메주가 익어가는 냄새가 사라지는 실존적인 상실입니다.
토종 콩의 이름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입니다. 맛이 너무 좋아 선비가 가던 길을 멈추고 주저앉아 먹었다는 '선비잡이콩'. 과거의 선비가 체통을 버릴 만큼 매혹적이었다면, 오늘날 우리를 붙들고 있는 무거운 사회적 가면을 벗겨주는 선비해방콩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작가의 이야기가 재밌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의 예시 단어였던 '우케'라는 사라진 단어도 소환합니다. 방아 찧기 위해 넣어둔 벼를 뜻하는 '우케'가 사라진 것은, 우리가 더 이상 벼를 그런 방식으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고보니 이 책을 펼치고서야 처음 알게 된 콩이 참 많았습니다.
저자가 직접 크레파스로 그린 콩 그림들이 다정합니다. 콩마다 가진 고유한 얼룩과 흠집을 가감 없이 드러냅니다. 저마다 다른 무늬로 저마다 다른 색으로 사는 콩. 강낭콩 꼬투리를 열 때마다, 강낭콩을 씻을 때마다 무늬가 길든 짧든 얽히고설켰든 한 줄이든 한 점이든 다 달라서 다 멋지더라고 합니다.
우리는 왜 성형 앱 보정하듯 자신의 삶을 보정하려 들까요? 저자는 다름이 서로에게 선물이 되는 세상을 꿈꿉니다. 콩의 무늬가 제각각인 것이 결함이 아닌 멋이듯, 우리의 주름진 일상과 울퉁불퉁한 성격도 그 자체로 고유한 무늬라는 깨달음을 줍니다.
콩의 종류만큼이나 인간의 감정도 다채로워야 마땅합니다. 저자는 콩들이 서로 교잡되어 새로운 맛과 특징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설명하며, 인간의 욕심에 의한 종자 획일화 문제를 비판합니다.
좋은 맛, 좋은 음식을 찾으려는 노력이 곧 혁명으로 이어지는 재미난 상상은 미식이라는 행위가 어떻게 정치적이고 생태적인 실천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책은 만듦새부터 콩을 닮았습니다. 재생종이와 콩기름 잉크를 사용하고 표지 코팅을 과감히 생략한 작은 책은 쉽게 때가 타고 상처 입는 우리네 삶을 은유합니다. 작가는 그 흠집조차 너그럽게 받아달라고 말합니다.
『자기 씨앗대로 산다』는 비교라는 지옥에서 벗어나 나라는 씨앗의 고유성을 긍정하라는 치유서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어떤 씨앗이 자라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