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건우, 베토벤의 침묵을 듣다
김재철 지음 / 열아홉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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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올해로 피아노 인생 70년을 맞이한 거장 백건우, 그리고 그와 오랜 세월 영혼의 주파수를 맞춰온 김재철 전 MBC 사장이 함께 쓴 『백건우, 베토벤의 침묵을 듣다』.


베토벤 사후 200주년(2027년)을 앞두고,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영국의 바스와 카디프까지 4박 5일간 걷고 대화하며 길어 올린 소리 너머의 소리에 관한 기록입니다.


그런데 의아했습니다. 독일의 생가나 빈의 묘지가 아닌, 영국 웨일즈의 숲길과 카디프라니요. 이 여행은 베토벤의 흔적을 찾는 여행이라기보다, 백건우라는 예술가가 베토벤이라는 거대한 정신과 함께 영국의 낯선 풍경 속을 걷는 영성의 시간에 가깝습니다.


단순히 베토벤은 위대하다는 식의 고루한 찬양은 이 책에 없습니다. 대신 그곳엔 고립된 섬마을의 파도 소리, 청력을 잃은 작곡가의 절규, 그리고 사랑을 잃고 오직 음악으로만 생존해야 했던 한 예술가의 단단한 생애가 흐르고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서사는 설렘과 긴장을 동반합니다. "출발한 지 30분 정도 지났을까. 어둠이었다. 해저터널에 들어선 것이다. 그리고 이 어둠에서 저 건너편으로 나오면 우리는 새로운 도시와 새로운 생각을 마주하게 된다. 이 여행은 그렇게, 한 빛에서 또 다른 빛으로 넘어가는 음악처럼 시작되었다."


어둠(절망)을 지나 빛(희망)으로 나아가는 과정, 그것은 베토벤의 음악적 구조이자 백건우가 평생 건반 위에서 증명해온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기차는 런던 패딩턴 역을 떠나 고대 로마의 향기가 어린 도시 바스로 향합니다. 여기서 두 사람은 베토벤 생애 최악의 순간이었던 귀가 들리지 않게 된 시점을 소환합니다.


베토벤을 박제된 위인이 아니라 자신의 신으로 고백하는 백건우. 여기서 신은 인간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한계를 예술로 치환해낸 절대적 의지의 상징입니다.





베토벤의 비극은 소리를 다루는 자에게 소리가 사라졌다는 점에 있습니다. 하지만 백건우는 여기서 역설을 발견합니다. 외부의 소음이 차단되었을 때, 비로소 내면의 바다가 요동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타인과의 소통이 단절된 자가 느끼는 극한의 고독을 맛본 베토벤. 그러나 백건우는 이 침묵을 결핍이 아닌 정제된 본질로 해석합니다. 소리가 들리지 않기에 그는 우주의 진동을 악보에 옮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바스의 밤은 깊어지고, 대화는 베토벤의 은밀한 사랑으로 옮겨갑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어느 지점에서 급격히 단단해졌는가에 대한 백건우의 분석이 이어집니다. 요제피네가 떠난 후 베토벤의 음악은 단단해졌고, 고독이 철학이 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베토벤이 겪은 연애의 실패와 고립이 결과적으로 그의 음악을 보편적 인류애와 우주적 고독으로 승화시켰음을 짚어냅니다.


스페인의 화가 고야와 베토벤, 두 거장은 모두 귀가 멀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야는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캔버스 위에 폭풍처럼 또 다른 색을 쏟아냈을거라는 백건우의 말이 와닿습니다.


베토벤의 '운명'은 고야의 검은 색조를 움직였을 것이고, '영웅'은 그가 그린 빛나는 붉은색과 황금색을 깨웠을 거라고 말입니다. 베토벤의 음악이 단순한 청각 신호를 넘어, 고야의 '검은 그림'처럼 인간 심연의 어둠을 폭로하고 동시에 황금빛 구원을 제시한다는 시각적 상상이 돋보입니다.


여행은 이제 웨일즈의 수도 카디프로 이어집니다. 바다가 보이는 카디프에서 백건우는 베토벤의 음악에 바다가 부재함을 짚어줍니다. 베토벤의 음악에 파도 소리는 없지만, 인간의 감정이 요동치는 내면의 해일은 존재합니다. 백건우는 베토벤이 외부 풍경을 묘사하는 대신 자신의 영혼을 채굴하는 방식을 택했음을 이야기합니다.


백건우의 평생 반려자이자 예술적 동지였던 배우 윤정희를 회상하는 대목도 인상 깊었습니다. 음악은 사랑을 잃은 사람의 마지막 언어라는 담담한 고백이 울림을 줍니다. 연주자 백건우가 아니라 사람 백건우를 만납니다.





인터뷰 파트에서는 젊은 예술가들을 향한 따뜻한 조언들로 가득합니다. 백건우는 후배들에게 빈의 골목을 걷고, 베토벤이 자살을 결심했던 숲에 서 보라고 권합니다. 그건 레슨으로는 절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음악이 화려한 박수갈채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고립된 곳, 조용한 곳, 그리고 누군가 기다리는 곳에 음악이 필요하다는 그의 철학은 섬마을 콘서트를 이어가는 그의 행보에서도 보여집니다.


베토벤이라는 렌즈를 통해 백건우라는 거장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다시 그 내면을 통해 우리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백건우, 베토벤의 침묵을 듣다』. 김재철 저자는 뛰어난 관찰자이자 질문자로서 백건우의 깊은 침묵 속에 숨겨진 보물 같은 문장들을 길어 올렸습니다.


이 책은 베토벤 여행기가 아니라, 한 예술가가 자기 인생을 다시 읽는 여행이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세계를 따라 걷는 여행의 매력을 보여줬습니다. 베토벤을 좋아하는 사람이 베토벤의 흔적을 따라 걸었듯이, 저도 사유의 여행을 하고 싶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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