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세를 깬 자들 - 프랑크 제국과 중세의 운명을 바꾼 형제들의 전쟁
매슈 게이브리얼.데이비드 M. 페리 지음, 최파일 옮김 / 까치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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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박제된 박물관 속 중세가 아니라, 넷플릭스 드라마로 제작되어도 될 만한 지독하게 인간적인, 그래서 더 잔혹한 연대기를 만나봅니다.


매슈 게이브리얼과 데이비드 M. 페리가 함께 쓴 『맹세를 깬 자들』. 유럽을 제패했던 프랑크 제국의 전성기와 몰락을 파헤치는 역사책입니다. 버지니아 공대의 중세학 교수 매슈 게이브리얼과 저널리스트이자 역사학자인 데이비드 M. 페리. 전작 『빛의 시대, 중세』를 통해 우리가 알던 암흑기 중세라는 편견을 박살 낸 바 있는데요.


이번에는 그 빛의 이면에 가려진, 형제들이 서로의 심장에 칼을 꽂으며 만든 그림자를 추적합니다. 통일 제국이라는 거대한 가스라이팅을 해체하는 책 『맹세를 깬 자들』. 8~9세기 프랑크 제국의 아수라장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운 카롤루스 마그누스(샤를마뉴)의 위대함은 사실 깃펜과 양피지로 정성스럽게 포장된 결과물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카롤루스 왕조가 어떻게 메로베우스 왕조로부터 왕관을 훔쳤는지, 그리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가족의 희생이 따랐는지를 보여줍니다. 혈연은 권력 앞에서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되었고, 제국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신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신화를 유포했습니다.





절대 권력자라는 타이틀 뒤에는 늘 자기 지분을 요구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가 있었고, 그들의 맹세는 언제든 깨질 준비가 된 유통기한 짧은 계약서에 불과했습니다. 경건왕 루도비쿠스가 아헨의 궁정으로 들어설 때, 그의 권력에 방해가 될 만한 친척들이 '편리하게도' 자연사하거나 사라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기록자들은 이를 신의 섭리로 세탁했지만, 저자는 그 행간에서 비릿한 피 냄새를 잡아냅니다. 그야말로 막장 드라마입니다.


루도비쿠스 1세의 치세는 겉보기에 평화로워 보였지만, 실상은 곪아가는 상처였습니다. 제국의 내부 균열이 어떻게 폭발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역병과 기근이라는 자연의 재앙은 왕의 권위를 흔들었고, 그 틈을 타 아들들이 아버지를 상대로 하극상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가장 상징적인 사건은 833년의 이른바 거짓말의 들판 사건입니다. 아들들이 군대를 몰고 와 아버지 루도비쿠스를 폐위시키려 했던 이곳에서, 황제의 지지자들은 하룻밤 사이에 모두 반대편으로 등을 돌렸습니다. 어제의 충성 서약이 오늘의 배신으로 바뀝니다.


놀라운 점은 루도비쿠스가 이 굴욕을 겪고도 다시 복권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아들들을 용서하고 처벌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권력을 유지하려 애쓰지만, 결국 더 큰 폭발을 위한 에너지 응축에 불과했습니다. 루도비쿠스가 죽자마자 세 형제(로타리우스, 루도비쿠스 2세, 카롤루스)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인 제국을 찢어 발기기 위해 서로의 목줄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너무 잘 아는 형제들이기에 그 싸움은 더 치졸하고 잔인했습니다.


드디어 운명의 날이 밝습니다. 이 책의 클라이맥스인 841년 퐁트누아 전투가 등장합니다. 로마 제국의 부활을 꿈꿨던 프랑크 제국이 사실상 종언을 고하고, 오늘날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의 원형이 갈라져 나오는 역사적 산고의 현장입니다.





퐁트누아 전투는 시스템의 실패이자 엘리트들의 자존심 싸움이 낳은 참극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형 로타리우스에 맞서 두 동생인 루도비쿠스와 카롤루스가 연합했지만, 그 결과는 승자 없는 패배였습니다.


두 동생은 스트라스부르에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합니다. 이 맹세는 형을 공동의 적으로 상정한 야합의 산물이었습니다.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제국은 삼등분됩니다. 하나의 제국이라는 거대한 허구적 서사가 찢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허망한 결말이야말로 저자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입니다. 역사의 거대한 수레바퀴를 굴리는 동력은 고결한 이념이 아니라 권력자들의 사소한 시기심과 깨진 약속, 그리고 무의미한 폭력이었습니다.


19세기 이후 이 내전이 어떻게 국가의 신화로 재활용되었는지를 짚어보는 에필로그로 이어집니다. 패배와 분열의 역사가 민족주의의 서사로 다시 쓰이는 과정은 오늘날에도 반복됩니다. 


저자들은 묻습니다. 우리는 왜 이 내전을 잊었는가? 혹은 왜 우리는 이를 승리의 역사로 기억하고 싶어 하는가?


이 책은 역사의 행위자들이 내린 선택의 무게를 되짚어봅니다. 그동안 역사에서 지워졌던 궁정 여성들의 영향력이나 생존을 위해 기민하게 움직였던 이름 없는 관료들의 존재를 조명하기도 합니다.


9세기의 프랑크 제국은 21세기의 우리와 그리 멀지 않아 보입니다. 단합을 외치면서도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갈등을 양산하고, 공적인 맹세보다는 사적인 이익에 민감한 인간의 본성은 시대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모든 거대한 균열은 아주 작은 약속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맹세를 깬 자들』은 중세사가 지루하다는 편견을 날려버립니다. 마치 범죄 현장의 프로파일링처럼 흥미진진하게 풀어냈습니다. 유럽의 기원을 알고 싶은 역사 덕후라면 꼭 읽어야 할 책입니다. 왕좌의 게임을 재밌게 본 팬이라면 현실판 왕좌의 게임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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