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더니즘 : 위기의 문학 - 모더니즘 입문서 테리 이글턴 컬렉션
테리 이글턴 지음, 도원우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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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영문학계의 전설적인 석좌 교수이자 마르크스주의 문화 비평의 거장 테리 이글턴의 노련한 통찰이 집약된 『모더니즘: 위기의 문학』. 우리가 모던하다고 할 때 떠올리는 세련됨이나 깔끔함은 잊어주세요.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모더니즘은 세련된 카페의 인테리어가 아니라, 전통적 가치가 붕괴하고 언어가 제 기능을 상실한 위기 그 자체입니다.


그에게 모더니즘은 새로운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왜 기존의 언어와 세계 인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의 산물입니다. 원제 A Literature in Crisis는 곧 위기의 문학입니다. 모더니즘은 위기를 장식하는 예술이 아니라, 위기를 사고하는 문학입니다.


이 책은 20세기의 가장 화려한 몰락이자 혁명이었던 모더니즘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먼저 모더니즘과 모더니티의 미묘한 차이를 짚어줍니다. 모더니티가 기차, 비행기, 전기가 가져온 물리적 변화라면, 모더니즘은 그 변화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 정신의 몸부림입니다. 모더니즘이 단순히 새것을 찬양하는 사조는 아닙니다.





우리는 과거라는 배경이 있을 때만 현대성을 인지합니다. 하지만 모더니즘은 그 과거를 지워버림으로써 영원한 현재에 갇히고자 합니다. 테리 이글턴은 이를 망각의 형식이라고 부릅니다. 역사적 위기를 은폐하거나 혹은 그 위기에 정면으로 맞서기 위한 형식적 전략이었음을 분석합니다. 리얼리즘이 세계를 거울처럼 비추려 했다면, 모더니즘은 그 거울을 깨뜨려 파편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이 파편화야말로 우리가 마주한 진실이라는 겁니다.


이어서 모더니즘의 핵심 문제인 언어의 위기를 다룹니다. 모더니즘 작가들에게 언어는 더 이상 신뢰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니었습니다. 모더니즘이 왜 그토록 난해하고 추상적인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하게 됩니다. 대상(사물)과 그것을 지칭하는 이름(말)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현실이 사실은 언어에 의해 조작된 구성물임을 깨닫는 순간, 작가들은 새로운 언어, 혹은 감정이 배제된 정직하고 메마른 0도의 글쓰기를 갈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저자는 아도르노의 부정 미학을 끌어옵니다. 예술이 대중문화의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무용(無用)해지기를 선택했다는 분석입니다. 모더니즘 예술은 효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논리에 저항하기 위해 스스로를 난해한 성벽 안에 가둡니다. 독자 대중과의 불화를 자처함으로써 오히려 예술의 자율성을 지켜내려 했습니다.


『모더니즘: 위기의 문학』에서는 모더니즘의 흐름 안에서도 특히 공격적이었던 아방가르드 운동을 조명합니다.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로 이어지는 이 계보에서 예술은 삶을 변혁하는 폭탄이 됩니다. 이성이 지배하던 근대 사회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파국을 맞이했을 때, 예술가들이 느꼈던 환멸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성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대항해 광기와 우연을 처방전으로 내놓았습니다.


변기를 전시장으로 가져온 뒤샹의 시도는 장난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제도의 권위를 해체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던 겁니다. 테리 이글턴은 아방가르드의 시도가 예술의 죽음을 선언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예술을 삶의 영역으로 확장하려 했음을 짚어줍니다.





모더니즘과 정치적 보수주의의 기묘한 결합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엘리엇, 파운드, 예이츠 같은 모더니즘의 거장들이 왜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거나 심지어 파시즘에 경도되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저자는 이 모순을 보수 혁명가로 표현합니다. 사라져가는 전통과 질서를 그리워하며(보수), 그것을 지키기 위해 가장 파격적인 형식적 파괴(혁명)를 단행했습니다.


테리 이글턴은 모더니즘이 지닌 위기의 감각을 오늘날의 기후 위기, 디지털 파편화, 정체성의 혼란이라는 맥락으로 끌어옵니다. "모더니즘은 기존의 지배적 합리성이 재앙적으로 실패한 시대에 대안적 합리성을 모색하는 시도"라고 정의합니다. 우리가 지금 느끼는 불안과 허무,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탈진실의 시대야말로 모더니즘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일지도 모릅니다. 이글턴은 맹목적인 낙관을 경계하면서도, 위기 속에서 형식을 찾아내려 했던 모더니스트들의 노력을 변증법적 희망이라 부릅니다.


말이 어려워 보이지만, 뜻을 풀면 꽤 현실적인 개념입니다. 변증법은 모순과 충돌 속에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겨난다는 사고방식입니다. 테리 이글턴이 말하는 변증법적 희망이란 모더니즘이 실패했고, 세계는 위기에 빠졌지만 그 실패와 위기 자체가 새로운 사고와 실천의 조건이 된다는 뜻입니다.


모더니즘은 완전한 해답이 아니었습니다. 예술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합리성은 재앙적으로 무너졌습니다. 이 모든 부정과 붕괴를 인정한 뒤에야 비로소 다른 합리성, 다른 언어, 다른 공동체를 상상할 수 있다는 태도입니다. 그래서 희망이 있지만, 그 희망은 위기를 직시한 뒤에만 생기는 희망입니다. 희망은 현실을 외면할 때 생기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끝까지 밀어붙여 생각할 때 생긴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모더니즘: 위기의 문학』은 우리가 처한 위기를 어떻게 해석하고 견뎌낼 것인가를 이야기합니다. 루카치, 아도르노, 앤더슨, 제임슨을 가로지르며 모더니즘 비평사를 재구성하고, 그 끝에서 테리 이글턴은 변증법적 희망을 제시합니다.


한국어판 서문이 주목할 만합니다. 테리 이글턴은 모더니즘을 서구 전유물로 보는 시각을 거부하고, 한국을 포함한 비서구 사회의 모더니즘을 인정합니다. 식민지와 반식민지 국가에서 모더니즘은 서구와는 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전통과 근대, 민족과 세계, 저항과 협력 사이의 긴장 속에서 독특한 형태의 모더니즘이 발전했습니다.


한국의 1930년대 모더니즘 문학, 일본의 신감각파, 중국의 5·4 운동기 문학은 모두 서구 모더니즘을 수용하면서도 자신의 역사적 맥락에서 재해석했습니다. 모더니즘이 보편적 문학사조가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위기에 대한 다양한 응답들의 집합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현재 우리는 왜 모더니즘을 읽어야 할까요? 모더니즘이 직면했던 위기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언어와 현실의 괴리, 경험의 파편화, 의미의 상실, 전통적 가치의 붕괴. 이 모든 것이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SNS의 알고리즘은 우리의 경험을 무수한 조각으로 쪼개고, 뉴스 피드는 맥락 없는 정보의 홍수를 쏟아냅니다. 우리는 접속되어 있지만 고립되어 있고, 정보는 넘쳐나지만 의미는 결핍되어 있습니다. 엘리엇이 『황무지』에서 그려낸 파편화된 현대 도시의 풍경과 닮아 있습니다.


『모더니즘: 위기의 문학』은 모더니즘의 실험과 실패, 성취와 한계를 분석하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판적 계승임을 보여줍니다. 현재의 거울로서의 모더니즘사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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