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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철학 - 철학은 언제나 작은 균열로부터 시작된다
강나래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인류가 만들어낸 지적인 폭동과 혁명의 현장 『친절한 철학』. 200쪽 남짓한 분량에 마키아벨리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하지만 이 책은 무게가 아니라 밀도로 승부합니다. 서울 한성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강나래 저자는 비즈니스 현장의 최전선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알고리즘이 지배하는 세상과 고전적 사유의 교차점을 몸소 겪어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현실 밀착형 인문학을 펼쳐보입니다.
철학이 안락한 의자 위에서 탄생했다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철학은 언제나 피 냄새 나는 전장과 요동치는 권력의 중심부에서 호출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불안정한 이탈리아의 정세 속에서 탄생한 마키아벨리의 냉혹한 리얼리즘을 첫 번째 균열로 보여줍니다. 도덕이라는 허울을 벗겨낸 정치가 얼마나 적나라한 생존 게임인지를요.

루소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는 단순히 다수결이 아니었습니다. 다수가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일반의지는 공동체 전체의 이익을 향하는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여론이 일반의지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고 합니다. 현재의 SNS 여론 정치를 명쾌하게 비판합니다. '좋아요'의 숫자가 정의의 척도가 되어버린 시대, 우리는 루소가 경고한 다수결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저자는 존 롤스의 공정성 담론까지 연결하며 권력의 구조를 해부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가장 역동적인 임무였음을 짚어줍니다.
경제는 숫자의 영역이라고 대부분 생각하지만, 그 숫자를 움직이는 것은 결국 철학적 가치관입니다. 저자는 로크의 사유재산권 개념이 어떻게 근대 자유주의의 뼈대를 세웠는지, 그리고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이 도덕감정이라는 절제 장치를 전제로 했음을 짚어냅니다.
장 보드리야르의 소비사회 담론도 흥미진진합니다. 명품 가방을 사고 최신형 스마트폰에 열광하는 것이 물건의 기능 때문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 물건이 상징하는 기호를 소비합니다. 저자는 현대의 과시적 소비문화를 보드리야르의 렌즈로 투사하며, 우리가 무엇을 소유하고 있는지보다 무엇에 의해 소비되고 있는지를 성찰하게 만듭니다. 플렉스(Flex) 문화 이면에 숨겨진 공허한 기호들의 파티를 목격하게 됩니다.
한때 세계의 모든 정답은 신에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그 신의 자리에 '나'를 앉혔습니다. 인류사적 쿠데타로 바라봅니다. 새로운 과학혁명의 기초였고, 근대 민주주의의 토대였으며, 오늘날 우리가 개인과 합리성을 당연하게 여길 수 있는 바탕이 되었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마침표를 찍은 인물이 니체입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는 선언을 염세주의적 비탄이 아닌,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해방의 종소리로 해석합니다.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는 세계에서야말로,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라는 질문이 비로소 진지해지고, 그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 자체가 니체가 말한 초인의 길에 들어서는 첫걸음이라고요. 확실한 정답이 사라진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니체는 타인이 정해준 가치에 안주하지 말고 스스로의 입법자가 되라고 말한 겁니다.
과학적 발견은 철학적 사유의 지평을 강제로 확장시켰습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이 인간을 우주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냈다면,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을 신의 특별한 창조물에서 우연한 진화의 산물로 내려놓았습니다. 이 과학적 충격이 인간의 실존적 위기를 불러왔음을 주목합니다. 20세기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은 우리가 믿어온 견고한 현실마저 확률과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친절한 철학』은 과학이 던진 질문을 철학이 어떻게 수습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는지를 추적합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거대한 트라우마를 남겼습니다. 합리적이라고 믿었던 인간이 저지른 광기 어린 학살 앞에서 철학은 깊은 자괴감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그 잿더미 위에서 실존주의라는 가장 뜨거운 언어가 탄생했습니다. 카뮈는 부조리를 끝까지 응시하고, 그 속에서 긍정하는 태도를 강조했습니다. 반항은 무기를 들고 싸우는 행위만이 아니라, 허무주의에 굴하지 않고 매일의 삶을 이어 가는 행위, 의미 없는 세계 속에서도 인간다운 존엄을 지켜 내려는 결단이었음을 짚어줍니다.
또한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언급하며, 비판적 사고 없이 체제에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지 경고합니다. 무기력한 일상에 매몰된 현대인들에게 실존주의는 당신은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존재라는 구원투수로 다가옵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시선을 밖이 아닌 안으로 돌립니다. 칸트가 규명한 인간 인식의 틀, 프로이트가 발견한 거대한 무의식의 대륙,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이 천착한 언어의 세계까지. 특히 비트겐슈타인의 대목은 평소 끌렸던 문장,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더욱 깊이 있게 다가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은 언어의 한계가 곧 사고의 한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언어를 새롭게 쓰고, 다른 언어게임을 창조함으로써 다른 세계를 열 수 있다는 희망을 열어준다는 해석이 와닿습니다. 우리가 쓰는 단어 하나, 문장 하나가 곧 우리가 거주하는 세계의 경계선이라는 지적은, 함부로 말을 내뱉는 시대에 경종을 울립니다.
먼 미래에서 지금 오늘, AI 시대의 철학을 바라본다면 어떤 주제를 다룰까 하는 즐거운 상상도 해봤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AI를 단순한 도구로 볼지, 아니면 자신의 확장된 자아로 볼지 치열하게 고민했었지라고 말할까요? 다원적 존재와의 공존을 연습하던 태동기로 기억할까요? 생산성 만능주의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수호한 마지막 보루로 평가할까요? 어찌됐든 기술과 공진화하는 법을 처음으로 배운 혼돈의 철학 혹은 적응의 철학으로 정의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강나래 저자의 『친절한 철학』은 철학자들의 족보를 외우는 책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의 시대를 지키기 위해 던졌던 치열한 질문들을 오늘날 우리의 고민 위로 소환합니다. SNS 여론, 무분별한 소비, 실존적 불안 등에 대해 질문을 깊게 만들어 철학이 우리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게 돕는 내적인 근력임을 보여줍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아주 미세하지만 결정적인 균열이 생길 겁니다. 그리고 그 틈 사이로 새로운 사유의 빛이 들어오기 시작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