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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명카피 핸드북 - LONG LIVE THE LAZY 게으른 자여, 영원하라
김은수 지음, 김민경.라이언 박 감수 / 길벗이지톡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문장 하나가 세상을 바꾸고, 단어 한 줄이 브랜드의 운명을 결정짓는 카피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200개의 문장을 큐레이션한 아주 특별한 책 『영어 명카피 핸드북』을 소개합니다. 한손에 들어오는 컴팩트한 사이즈의 책이어서 실용적입니다. QR로 책 속 카피의 광고 이미지나 영상을 함께 볼 수 있습니다. 텍스트를 넘어 당시의 영상미, 배경음악, 모델의 표정까지 실시간으로 소환합니다.
김은수 저자는 한국과 미국의 문화를 몸소 체험하며 미묘한 결을 읽어낼 줄 아는 탁월한 문화 통역사입니다. 제일기획과 아모레퍼시픽 등 글로벌 브랜드의 최전선에서 삼성 등 거대 기업의 커뮤니케이션을 리드했던 이력을 바탕으로 이 책은 영어 학습서이자 브랜드 전략서로 기능합니다. LA에서 로컬라이제이션 전문가로 활동하며 수집한 200개의 카피는 미국인들의 욕망과 철학, 그리고 시대정신이 응축된 결정체입니다.

미국 광고의 핵심 키워드를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문장들로 시작합니다. 미국 광고에서 가능성은 추상적인 희망이 아니라, 움직임과 행동으로 증명되는 가치입니다.
WHEN WE ARE FREE TO MOVE, ANYTHING IS POSSIBLE.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을 때 불가능은 없어요) 토요타의 카피는 움직임이라는 물리적 속성을 인간의 가능성이라는 철학적 가치로 전이시킵니다. 패럴림픽 금메달리스트 로렌 울스텐크로프트의 서사를 빌려와 제품이 아닌 태도를 파는 미국 광고의 진면목을 보여줍니다. 미국에서 도전과 희망을 말할 때 자주 쓰이는 Anything is possible. 문화적 맥락까지 함께 짚어줍니다.
LG의 2024년 광고 카피는 WE DON'T MAKE, LIFE GOOD. YOU DO. 미국 광고에서 자주 쓰이는 Empowerment 카피의 전형입니다. 삶을 멋지게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당신입니다라며 사람 중심 브랜드 철학을 전면에 내세웁니다. AI, 가전, 플랫폼, 자동화 기술이 삶을 대신 살아주는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LG는 삶을 대신 설계하는 회사가 아니라 당신의 삶을 돕는 조력자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기술이 세상을 바꾸는 시대에 세정제 브랜드 클로락스의 사례는 일상적인 언어가 어떻게 거창한 혁신보다 더 깊은 울림을 주는지 보여줍니다. CLEAN IS THE BEGINNING. WHAT COMES NEXT IS EVERYTHING. (먼저 청소하세요. 멋진 일이 찾아온다니까요.)라는 문장을 만나보세요. 청소를 끝이 아닌 시작으로 정의하는 순간, 지루한 가사 노동은 설레는 내일을 준비하는 신성한 의식이 됩니다. This is just the beginning이라는 관용구에 What comes next를 결합한 문장 구조를 분석하며, 언어가 어떻게 소비자의 기대를 설계하는지 가이드합니다.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LONG LIVE THE LAZY. (게으른 자여, 영원하라)가 돋보입니다. 과연 어떤 브랜드의 카피일지 짐작되시나요? LA-Z-BOY의 이 명카피는 위트 넘치는 언어의 유희를 포착합니다. 영국 왕실의 Long live the King을 패러디하여, 리클라이너에 파묻혀 게으름을 부리는 현대인을 왕의 반열에 올립니다. 게으름이라는 추상적 개념이 게으른 자들이라는 연대 의식으로 확장되는 과정을 설명합니다.
미국 미디어 기업 타임워너가 내놓은 카피 STAND UP. STAND OUT. (당당하게 일어서, 돋보이도록.) 강렬합니다. 문맥상 불의에 맞서 일어서다라는 저항과 용기를 뜻한다고 합니다. 여기엔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로드니 킹 폭행 사건 가해 경찰들이 무죄 판결을 받으며 인종 차별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1992년 LA 폭동. 타임워너는 혼란에 빠진 사회에 함께 연대하여 위기를 극복하자는 메시지를 이 짧은 두 문장에 압축해 전달했습니다. 너의 존재와 목소리를 세상에 드러내라는 Stand out 표현을 배워봅니다.
DON’T THROW ANYTHING AWAY. THERE IS NO AWAY. (버린다는 건 없습니다. 어딘가에 남을 뿐이죠.) 문장은 에너지 기업 쉘(Shell)이 언어적 반전을 통해 환경보호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줍니다. 쉘이 이산화탄소를 온실 꽃 재배에 재활용하는 사실을 알리는, 사회적 책임을 지키려는 기업의 광고입니다.

미국 카피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비장미보다는 위트와 여유에 있습니다.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통해 미국인들이 삶의 비극조차 어떻게 유머러스한 카피로 승화시키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브랜드에 대한 강력한 팬덤을 형성하는지 설명합니다.
왜 이 문장이 당시 미국 사회를 뒤흔들었는지, 왜 이 단어 선택이 당시의 정치적 올바름과 맞닿아 있는지를 인문학적으로 추적합니다. 전작 『일본어 명카피 핸드북』이 일본 광고 특유의 함축과 절제의 미학을 다뤘다면, 이번 『영어어 명카피 핸드북』은 직관적이고 도발적이며, 때로는 가슴 벅찬 응원을 보내는 미국적 에너지를 가득 담고 있습니다.
영어 공부를 위해 펼쳤다가 인생의 문장을 만나게 되고, 마케팅 아이디어를 얻으려다 인간에 대한 이해를 넓히게 되는 매력을 지닌 명카피 핸드북입니다. 저자가 큐레이팅한 200개의 문장은 거친 자본주의의 정글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의 지혜들입니다. 교과서적인 문법에서 벗어나, 실제 미국 사회에서 사람들을 웃기고 울린 임팩트 있는 짧은 문장들을 통해 언어 감각을 끌어올리고 싶은 분들께 최고의 교재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