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빛나는 삶
마일스 프랭클린 지음, 고상숙 옮김 / 북레시피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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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19세기 말 호주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터져 나온 한 여성의 비명이자 축가, 마일스 프랭클린의 『나의 빛나는 삶(My Brilliant Career)』. 고전의 재발견입니다.


마일스 프랭클린이라는 이름은 오늘날 호주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의 명칭으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 이름 뒤에는 19세의 나이에 세상을 향해 나는 나로 살겠다며 펜을 휘둘렀던 한 소녀의 치열한 야망이 숨어 있습니다.


1901년 호주가 영국의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 연방으로 독립하던 바로 그 역사적 원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국가의 탄생과 함께 자아의 탄생을 선포한 텍스트입니다. 넷플릭스 드라마화로 다시금 뜨거워진 이 소설을 만나봅니다.


소설 초반은 시빌라의 유년기와 포섬 걸리로의 이주 과정이 펼쳐집니다. 생존 투쟁기에 가깝습니다. 마일스 프랭클린 저자는 뉴사우스웨일스의 척박한 농가에서 성장한 자신의 경험을 시빌라라는 인물에 고스란히 투영했습니다.


그녀는 스스로를 "못생긴 데다 성미는 고약하고 불만에 찬 존재"라고 자책합니다. 자신을 가두려는 가부장적 농촌 사회의 협소한 틀에 대한 반어적 저항입니다. 40~50도를 오르내리는 극한의 가뭄 속에서 소들이 굶어 죽어가는 비참한 현실은 예술적 감수성을 지닌 시빌라의 영혼을 질식하게 만듭니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시빌라의 반항입니다. 신의 뜻으로 정해진 삶에 자신을 꿰맞추려 애쓰지만, 억눌린 영혼은 틈만 나면 불쑥 솟아올라 정적인 마을의 공기를 뒤흔듭니다.


지옥 같은 포섬 걸리를 떠나 할머니의 저택으로 향하는 여정은 시빌라에게 일시적인 해방을 선사합니다. 이곳에서 예술을 논하고, 아름다운 자연에 탐닉하며 비로소 숨을 쉽니다.


하지만 이 낙원에는 교묘한 덫이 놓여 있습니다. 바로 결혼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안착입니다. 부유하고 매력적인 해럴드 비첨의 등장은 시빌라의 삶을 흔들어 놓습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절묘한 감각으로 다가오지만, 시빌라는 본능적으로 직감합니다.


해럴드의 아내가 되는 순간, 자신의 비범한 커리어는 평범한 가사로 대체될 것임을 말이죠. 시빌라는 사랑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이유로 자신을 삭제하라는 세상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맷스왓 가문의 가정교사 시기의 시빌라는 계급과 노동의 문제에 눈을 뜹니다. 호주 농촌 사회의 밑바닥을 경험하며 자신이 억압적인 구조 속에 놓인 존재임을 깨닫습니다. 훗날 마일스 프랭클린이 미국과 영국에서 여성 노동운동과 주거권 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실천적 삶의 뿌리가 됩니다.


해럴드의 끈질긴 청혼을 뿌리치고 돌아간 포섬 걸리. 그곳은 여전히 가난하고 고됩니다. 표면적으로는 실패한 귀환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빌라가 내리는 결론은 이 소설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습니다.


"나는 내가 현명한 선택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라고 말입니다. 시빌라는 누군가의 아내로 남는 것보다 더 가치 있는 것, 즉 나 자신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를 선택합니다. 189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고려할 때, 개벽에 가깝습니다. 로맨스 소설의 문법을 따라갔다면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이야기가, 시빌라의 목소리를 통해 여성 주체 서사라는 새로운 영토로 나아갑니다.


마일스 프랭클린은 19세에 이 원고를 들고 출판사를 전전하며 호주적인 문학을 꿈꿨다고 합니다. 그녀의 꿈은 '마일스 프랭클린 상'으로 꽃피웠고, 오늘날 호주 문학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125년 전의 소설이지만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숨 쉽니다. 성공이 아닌 실패할 권리를, 순응이 아닌 불편한 자립을 선택한 시빌라 이야기. 꿈과 현실, 사랑과 자립 사이에서 길을 잃은 청춘들에게 묘한 해방감을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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