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 - 다채로운 말로 엮은, 어휘 산책집
권정희 지음 / 리프레시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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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가들에게 늘 이렇게 조언했습니다. 설명하지 말고, 보여줘라(Show, Don't tell). 소설가 지망생뿐만 아니라 하루에도 수만 개의 문장을 허공으로 날려 보내는 우리 모두에게 유효한 말입니다.


우리는 슬프다, 좋다, 대박이다라는 몇 가지 납작한 단어 속에 자신의 거대한 감정 세계를 억지로 구겨 넣곤 합니다. 감정의 해상도는 4K급인데 이를 표현하는 어휘는 흑백 텔레비전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격입니다.


국립국어원에서 <감동을 부르는 말하기>를 강의하며 20여 년간 문학의 뜰을 가꿔온 권정희 저자는 『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혹은 애초에 이름 붙이지 못해 흘려보냈던 미세한 감정의 결들을 복원해내는 고품격 어휘 에세이를 선보입니다.


우리 내면의 삭막한 황무지에 다채로운 어휘라는 씨앗을 뿌려, 각자의 삶에 울창한 마음의 숲을 조성하도록 돕는 정원사에 가깝습니다.


저자는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풍경과 일상적 사건들에 이름을 붙여줌으로써 그것들을 비로소 나의 것으로 소유하게 만듭니다. 아침 햇살을 보고 무심코 넘기지만, 저자는 햇귀라는 아름다운 단어로 치환해냅니다.





새벽녘, 긴 어둠을 지나 해가 막 뜨려고 할 때 서서히 몰려오는 환한 빛이 햇귀입니다. 밤새 날이 밝기를 기다린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반가운 빛인 겁니다. 단순히 어둠이 가시는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간절한 기다림 끝에 당도한 반가운 빛이라는 서사가 부여됩니다. 어휘를 안다는 것은 세계를 해석하는 관점을 확장하는 일입니다.


강물이나 바다 위에 부서지는 햇살을 뜻하는 윤슬이라는 단어를 통해 일상의 미학을 극대화합니다. 강물 같은 표면에 햇빛이나 달빛이 비쳐 반짝이는 물결을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윤슬입니다. 당신의 퇴근길은 그저 지루한 이동 시간이었나요 아니면 윤슬이 반짝이는 예술의 현장이었나요?


우리는 일상에서 잡박하게(질서가 없이 이것저것 마구 뒤섞여 있다) 뒤섞인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해 우두망찰(정신이 얼떨떨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모양) 서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는개(안개와 비의 중간)같은 모호한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고, 적바림(메모)을 통해 마음을 잡도리(단단히 준비함) 해볼까요?





『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를 읽고나면 우리가 무심코 사용했던 임장 대신 집알이를, 갹출 대신 추렴을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삶의 온도를 인간적으로 만드는지 깨닫게 됩니다.


관계에서 상처받거나 오해를 살 때, 대개 어휘의 부족으로 인해 본심을 왜곡하곤 합니다. 저자는 포시랍다, 틀거지, 주릅 등 평소 접하기 힘든 생소한 우리말과 방언, 한자어를 통해 관계의 철학을 논합니다.


현대 사회의 관계는 비즈니스적이거나 효율성 위주로 흐릅니다. 하지만 저자는 융숭(隆崇)한 대접이 타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품격을 높이는 행위임을 짚어줍니다. 미쁘다(믿음직하다)는 확신을 주는 사람, 웅숭깊다(생각이나 뜻이 깊다)는 평판을 듣는 사람의 삶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울림이 됩니다.


관계 속에서 우리는 따따부따(딱딱한 말씨로 따지고 다투는 소리) 따지거나 족대기며(볶아치다, 우겨 대다) 서로를 힘들게 합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침윤(서서히 젖어 듦)되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누군가 삶이 신산스럽게(보기에 힘들고 고생스럽게) 느껴질 때, 풀솜할머니(외할머니)처럼 포근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여유는 풍부한 어휘에서 나옵니다.


사랑과 이별이라는 인류 보편의 감정에 대한 단어도 배워봅니다. 사랑은 때로 에피파니(강렬한 깨달음)처럼 오고, 우리는 그 앞에서 바장이며(어쩔 줄 몰라 하며) 혼곤한 사랑에 빠지기도 합니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할 때 사용하는 모스 솔라(Mors Sola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나 애오라지(오로지) 같은 단어들은 사랑의 언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듭니다. 이별 후 가슴에 더껑이(지저분한 것이 덧붙은 것)가 앉은 것처럼 아플 때도, 저자는 해조음(파도 소리)이 들리는 숲으로 이끌며 위로를 건넵니다.


사랑의 과정에서 우리는 트레바리(이유 없이 남의 말을 반대함)를 놓기도 하고, 에멜무지로(결과에 상관없이 시험 삼아) 고백했다가 후회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이 해사한(맑고 깨끗한) 미소를 되찾기 위한 필연적인 산책임을 말해줍니다.


유행어나 축약어, 거친 비속어만 가득한 언어 환경은 황폐한 사막과 다름없습니다. 이 책은 어휘집을 넘어선 인생 수업입니다. 『그대, 말의 숲을 거닐다』는 우리가 잃어버린 감성적 언어를 복원해냅니다.


각 장의 끝에 배치된 책 속의 말 한 줄은 김소월, 백석 등의 문장을 통해 어휘의 실제 쓰임을 보여주며 독서 경험을 심화시킵니다. 맞춤의 비밀 코너도 실용적입니다. 주변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통해 해당 단어가 실제 삶의 맥락 속에서 어떻게 맥동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어 공감하며 읽게 됩니다.


말을 배우는 것이 결국 마음을 배우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무딘 언어의 칼날을 내려놓고, 권정희 저자가 정성껏 가꾼 말의 숲으로 기분 좋은 산책을 떠나보세요. 그 길 끝에서 한층 더 웅숭깊은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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