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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너머의 세계
야마자키 마리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5년 12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정체성을 어디에 속해 있는가로 정의하곤 합니다. 전 세계적인 히트작 『테르마이 로마이』의 작가 야마자키 마리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왔습니다. 14살 어린 나이에 독일과 프랑스로 홀로 배낭여행을 떠나고, 17살에 이탈리아 피렌체로 건너가 11년간 유화를 전공한 이력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서사입니다.
중동, 유럽, 남미를 거쳐 현재 미국 시카고에 이르기까지 야마자키 마리는 특정 국가의 국민이기 이전에 경계 위에 서 있는 관찰자로서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당신에게 라틴어 문장 하나쯤 있으면 좋겠습니다』를 인상 깊게 읽으며 이 저자를 눈여겨봤었는데 『문 너머의 세계』를 읽으며 삶의 태도를 선명하게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삶은 늘 문을 여는 쪽이었습니다. 『문 너머의 세계』는 수십 년간 여러 나라의 문을 열고 닫으며 마주한 인연을 통해, 낯선 타인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며 얻어낸 삶의 품격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야마자키 마리의 예술적 고향인 피렌체는 찬란한 르네상스의 유산만큼이나 지독한 가난과 고독이 공존하던 곳이었습니다. 작가는 예술학교 시절의 고뇌를 회고하며, 우리에게 표현자로서의 태도를 묻습니다.
표현자라는 호칭에 주목해봅니다. 화가, 만화가, 예술가라는 직업명이 아니라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정의는 결과보다 태도를 중시하는 저자의 미학을 드러냅니다. 야마자키 마리에게 예술은 완성된 작품 이전에 삶을 대하는 자세이며, 이 자세는 타인에게서 배워집니다. 피렌체라는 도시가 특별한 이유는 르네상스의 유산 때문이 아니라 예술을 삶의 일부로 살아내는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미래가 보이지 않던 유학생 시절, 고대 로마의 정신을 이어가는 장인의 시선은 작가에게 단순하지 않은 위로를 건넵니다. 예술이 박물관에 박제된 유물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의 얼굴에 깃든 빛임을 이야기합니다.
작가는 이탈리아인 특유의 멋이 단순히 겉치레가 아니라, 자신을 긍정하는 태도에서 비롯됨을 포착합니다. 아르노 강변의 여치처럼 작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이들의 일상은 야마자키 마리가 이후 그려낼 만화적 상상력의 튼튼한 토양이 됩니다.
작가는 타인을 만나는 행위를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에 비유합니다. 요즘 우리는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창에 매몰되어 옆자리에 앉은 타자의 존재를 지워버리곤 하지만, 야마자키 마리는 그 불편한 접촉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고 믿습니다.
완전한 우연 속에서 만나게 되는 타인이라는 존재는, 낯선 땅으로의 여행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인생관이나 삶의 방식을 바꿀지도 모르는 요소를 품은 미지의 장대한 세계 그 자체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타인을 자신만의 잣대로 재단하려 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여러 인연을 통해 '이해'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한 노동인지를 보여줍니다. 타인은 내가 가보지 못한 인생의 지도를 가진 이정표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행위는 곧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입니다.
포르투갈 리스본과 이탈리아 나폴리는 정체성의 혼란과 수용을 동시에 가르쳐준 공간입니다. 리스본의 낡은 아파트에서 만난 이웃들은 때로는 참견쟁이 같지만, 타향살이의 외로움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따뜻한 온기를 지녔습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는 여성의 삶입니다. 어머니가 남편과 헤어지고도 시어머니와 함께 살기를 원했던 것은, 한 여성으로서 한 인간으로서 시어머니 하루 씨를 진심으로 존경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통해 혈연보다 깊은 인간적 존경의 형태를 보여줍니다.
그 외에도 전통적인 가부장제 질서를 벗어나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 여성의 서사가 이어집니다. 사회적 통념이라는 문 너머로 탈출하려는 이들의 분투기입니다.
야마자키 마리의 시선은 인종과 국적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방인으로 규정하지 않고 각각의 독립된 문으로 대우합니다. 문화적 차이로 발생하는 충돌을 외면하는 대신, 그 충돌이 만들어내는 불꽃이 어떻게 우리의 고정관념을 태우는지 관찰하기도 합니다.

28편의 에세이를 마칠 무렵 작가는 우리에게 마지막 문을 열어 보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만난 이들의 목소리가 겹겹이 쌓인 마음의 지도입니다.
"지금까지 세계의 다양한 지역에서 살아오며, 내 안에는 온갖 경험으로 수많은 문이 마련되어 왔다." - p154
야마자키 마리의 『문 너머의 세계』는 경계를 지우는 예술가의 시선이 얼마나 세상을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찬란한 기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삶의 품위는 타인의 눈동자 속에 담긴 우주를 발견할 줄 아는 겸손한 시선에서 시작됨을 작가 특유의 위트 있는 문장으로 써내려갑니다.
당신의 인생 앞에 놓인 수많은 문 중, 오늘 당신은 어떤 문을 열어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