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라 맨숀
장지연 지음 / 북레시피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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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안전등급 D판정을 받고 허물어질 날만 기다리는 막다른 골목 끝 오로라 맨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로라 맨숀』. 6개월 치 월급을 떼인 자립준비청년 혜성과 고독사 직전의 할머니 복자가 김치 하나로 엮이는 서사, 각자도생의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사회적 가족의 가능성을 탐구합니다.


주인공 혜성은 자립준비청년으로서 동생 유성과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뼈빠지게 일했지만, 사장의 죽음으로 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임금을 날릴 위기에 처합니다. 그가 밀린 월급을 받으러 찾아간 곳이 바로 오로라 맨숀입니다.


1974년에 지어져 당장 허물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이 맨숀은 누군가에게는 하루빨리 청산하고 싶은 골칫덩어리 부채이지만, 사회적 안전망에서 배제된 혜성과 아들이 남긴 빚더미에 앉은 복자에게는 세상이 허락한 최후의 보루입니다. 혜성이 복자의 집을 찾아가는 행위는 채권 추심을 넘어, 무너져가는 삶의 끝단에서 서로의 실존을 확인하는 첫 걸음이 됩니다.


혜성은 문짝만큼 큰 덩치를 가졌지만 속은 한없이 여린 후천적 눈치 백단러입니다. 동생 유성은 삐딱선을 타며 가출팸의 유혹에 흔들립니다. 이들의 상황은 마치 심지에 불이 붙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습니다. 가난이라는 기침은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고, 언제든 이들의 삶을 폭파시킬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오로라 맨숀』은 여기서 분노의 방향을 바꿉니다. 혜성은 복자에게 행패를 부리지만, 그 분노의 이면에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나라는 자기혐오가 깔려 있습니다. 유성이 위험한 유혹에 노출되는 것 또한, 가난을 개인의 무능으로 치부하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반항입니다. 기침처럼 터져 나오는 고통을 다이너마이트 같은 파괴가 아닌, 삶을 개척하는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을지 우리에게 묻는 것만 같습니다.


독거노인 복자는 저혈당 쇼크로 쓰러집니다. 도와줄 가족도, 찾아올 이웃도 없는 공간에서 의식을 잃어가며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내게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때 응답한 것은 돈을 받으러 온 혜성의 벨소리였습니다. 원수 같은 목적으로 찾아온 이가 생명의 은인이 되는 아이러니. 생존을 향한 처절한 본능이 서로를 구원하게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합니다.


둘의 인연은 복자네 장독김치 장사로 이어집니다.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여기서 김치는 단순한 반찬이 아닙니다. "인생사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는데, 김치 맛은 내 맘대로 할 수가 있더라고."라고 말하는 복자 할머니. 힘없는 노인과 청년에게 주도할 수 있는 영역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손녀 아린이 브랜드 책임자로 합류하며 세대 간의 협업이 일어나는 과정까지 이들의 시너지가 흥미롭습니다.


복자 할머니의 아들이 남긴 것은 빚뿐이었지만, 할머니의 사람을 품는 마음과 고통을 삭이는 법은 그 어떤 유산보다 위대합니다. 젊은 세대가 노년의 서사와 섞이는 과정은 겉절이가 묵은지가 되어가는 숙성의 과정과 닮아 있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헤집는 대신, 그 상처 위에 양념을 치고 익기를 기다려주는 여유. 오로라 맨숀의 주민들이 서로에게 상속하는 진정한 유산입니다.





오로라 맨숀에는 다양한 이웃들이 등장합니다.각자의 상실을 안고 이 낡은 맨숀으로 모여들었습니다. 타인을 타자화하지 않고 나의 일상 안으로 끌어들이는 행위, 그것이 오로라 맨숀을 폐물에서 보금자리로 바꾸는 연금술입니다.


배추를 소금에 절이는 과정을 보면 빳빳하던 숨이 죽고, 수분이 빠져나가며 축 처집니다. 자립준비청년 혜성이 오로라 맨숀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의 모습이 딱 그랬습니다. 6개월 치 월급을 떼이고, 세상의 냉대에 숨이 죽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복자 할머니는 압니다. 배추가 소금에 충분히 절여져야만 비로소 양념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다는 것을요. 우리가 겪는 시련 또한 인생이라는 큰 통 안에서 맛이 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일지 모릅니다.


서로의 삶에 잠시 불을 켜주는 사람들의 이야기 『오로라 맨숀』. 장지연 작가는 특유의 유머와 현실 감각으로 이야기를 버무려냈습니다. 팍팍한 삶에 지쳐 나 자신이 미워질 때, 따뜻한 밥 한 공기에 복자 할머니의 묵은지를 올려 먹는 듯한 위로를 받고 싶은 이들에게 이 소설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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