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역습 - 인간 본성은 우리의 세상을 어떻게 형성했고, 구원할 수 있는가
하비 화이트하우스 지음, 강주헌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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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인류학계의 거장이자 옥스퍼드대학교의 지성, 하비 화이트하우스 교수의 역작 『인간 본성의 역습』. 거대한 인류 문명의 연대기가 펼쳐집니다. 하비 화이트하우스 교수는 세계 최대 인류 역사 데이터베이스 세샤트(Seshat)의 공동 설립자이며, 파푸아뉴기니의 정글부터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의 연단까지 발로 뛰며 인간의 응집력을 연구해온 인류학의 인디아나 존스 같은 인물입니다.


40년 연구를 집대성해 내놓은 이 책은 "우리는 왜 이토록 똑똑한 세상에서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반복하는가?"라는 뼈아픈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현대 사회의 온갖 갈등과 위기의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 먼저 우리 뇌에 각인된 세 가지 소프트웨어를 분석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회적 동물로 생존하기 위해 진화시킨 생존 키트였지만, 오늘날에는 뜻밖의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타인의 행동을 복제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는 그 행동의 목적을 모를 때 더 열심히 모방한다는 점입니다. 저자는 이를 의례의 동물(ritual animal)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이 순응주의는 원시 시대에 집단 학습을 가능케 한 혁신적인 도구였습니다. 남들이 독버섯을 안 먹으면 나도 안 먹는 것이 생존에 유리했으니까요. 하지만 현대의 SNS 세상에서 이 본성은 필터 버블과 집단 태만을 낳습니다. 남들이 환경 위기에 무관심해 보이면, 나 역시 개인의 죄책감을 끄고 군중에 섞여버리는 겁니다.


저자는 종교적 믿음이 우리 인지 구조의 허점을 파고드는 매력적인 직관에서 비롯된다고 분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특정 교리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를 믿고,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며, 세계를 설명하려는 성향 전반을 가리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의도나 행위자를 상상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이것이 종교성의 뿌리가 되어, 대규모 집단이 공동의 도덕적 가치를 공유하게 만들었습니다.


더불어 부족주의를 언급합니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본능입니다. 특히 강렬한 고통의 경험을 공유한 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정체성 융합은 가족보다 진한 유대를 형성합니다. 이처럼 순응주의, 종교성, 부족주의라는 세 가지 본성을 인간 사회의 기본 설정 값으로 두고, 이것이 어떻게 문명을 만들었고 또 어떻게 문명을 위기에 빠뜨렸는지를 추적합니다.


순응주의는 의례와 관습을 통해 소규모 공동체를 단단히 묶었습니다. 반복되는 행동은 의미를 축적하며, 개인을 집단의 일부로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농경사회와 함께 대규모 인구를 통합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왕권과 종교는 인간의 리더십 직관을 자극하며 거대 사회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안정성은 언제든 경직성과 폭력으로 전환될 수 있었습니다. 집단을 위해 목숨을 거는 부족주의는 전쟁과 정복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본능은 오늘날 정치적 양극화와 극단주의의 근원이기도 합니다.





『인간 본성의 역습』은 우리를 위기로 몰아넣은 바로 그 본성이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기후 위기 대응에서 저자는 인간의 순응주의를 활용한 설계를 제안합니다. 사용자의 탄소 발자국을 추적하고, 일상적 선택이 환경에 미치는 영향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마이어스(MyEarth) 앱 사례는 개인의 행동을 집단 규범과 연결해 변화를 유도하는 방식입니다. 내 행동을 매일 되돌아보게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친환경 선택을 보여주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따라갑니다. 순응주의를 선한 방향으로 설계하는 겁니다. 인간을 바꾸는 게 아니라, 인간이 이미 가진 본능을 활용하는 겁니다.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는 종교성은 원래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접착제였습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는 이 본성을 상업적으로 이용합니다. 브랜드 충성도, 팬덤 문화, 명품 소비 등 이 모든 게 종교성의 왜곡된 버전입니다. 특정 브랜드를 사면 공동체의 일원이 된 듯한 느낌을 받는 것처럼요. 저자는 이 본성을 잘 활용하면, 친환경 소비를 하나의 신념 체계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짚어줍니다. 재활용이 도덕적 의무가 아니라 정체성의 표현이 되는 겁니다. 종교성을 억누를 게 아니라, 더 나은 가치를 향하도록 방향을 바꾸는 겁니다.


부족주의는 지구 전체로 확장하자고 제안합니다. 우리 편의 범위를 인간을 넘어 모든 생명으로 넓히는 겁니다. 가족에서 부족으로, 부족에서 민족으로, 민족에서 국가로... 우리는 이미 그렇게 해왔습니다. 이제 한 단계 더 나아가 지구 공동체를 상상할 차례입니다.





『인간 본성의 역습』은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열어놓은 빅히스토리 서술의 전통을 잇습니다. 제러드 다이아몬드가 지리와 환경을, 유발 하라리가 허구를 믿는 능력을 강조했다면, 화이트하우스 교수는 인간 본성의 진화적 기원과 현대적 작동 방식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 책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류의 가장 위대한 성공과 실패를 통찰력 있고 흥미진진하게 설명한다"라고 평했고, 《가디언》은 "수십 년간 쌓아온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담은 야심찬 역작"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인간 본성의 역습』은 인류학, 진화심리학, 빅데이터 역사 분석을 통합해 보여줍니다. 우리는 선사시대 본능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고, 그게 문제의 근원이지만 동시에 해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 본성을 바꿀 순 없지만, 그 본성이 작동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제도를 재설계할 순 있습니다. 순응주의를 친환경 행동으로, 종교성을 지속 가능한 가치 추구로, 부족주의를 지구적 연대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같은 본성이 시대에 따라 어떻게 다르게 작동하는지 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본성은 고정되어 있지만 표현은 유연하다는 메시지를 체득하게 됩니다. 본성을 이해하는 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문명을 만든 것도 본성이었고, 이제 그 문명을 구할 것도 본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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