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지능의 역사 - 유레카부터 인공지능까지, 지성사를 통해 인간을 다시 묻다
이은수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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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이은수 교수의 『인간지능의 역사』는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인가라는 인공지능을 둘러싼 불안에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대신 질문의 방향을 비틀어 보여줍니다. 우리는 과연 인간지능(Human Intelligence)을 제대로 이해해온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요. 이 책은 고대 그리스에서 현대 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지식을 발견하고, 수집하고, 읽고 쓰며, 소통해온 방식을 지성사적으로 추적하며 인간지능의 정체를 다시 묻습니다.


저자 이은수 교수는 서울대학교 철학과 조교수이자 서울대 AI연구원 인공지능 디지털인문학센터장으로, 수학·고전학·과학사·디지털인문학을 가로지르는 이력을 지닌 연구자입니다. 이 책은 그 학문적 궤적이 집약된 결과물입니다. 고전을 읽는 눈과 최첨단 기술을 해석하는 감각이 긴밀하게 엮여 촘촘한 지성 지도로 완성되었습니다.


1부에서는 인간지능의 출발점을 '발견'이라는 행위에 둡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가 상징하듯, 발견은 계산의 결과가 아니라 직관과 감동 그리고 의미 부여가 결합된 사건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미를 부여하는 주체입니다. AI 역시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해 인간이 예측하지 못한 패턴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그 패턴이 왜 중요한지, 어떤 세계관을 흔드는지, 윤리적 책임은 어디에 있는지 묻지는 않습니다.





갈릴레오가 망원경으로 달의 표면을 보았을 때, 훅이 현미경 속 코르크 구조에 세포라는 이름을 붙였을 때, 발견은 비로소 인간의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발견의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해석이며, 기술은 발견의 도구일 뿐 서사의 주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합니다.


2부는 '수집'이라는 행위를 통해 인간지능의 생존 본능을 조명합니다. 지식의 수집 역사는 인류 문명 발전의 핵심 동력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근대의 백과사전 그리고 오늘날의 위키피디아와 AI 큐레이션까지 인간은 늘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지식을 모아왔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들어 지식은 더 이상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넘쳐흐릅니다. 문제는 무엇을 모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가려낼 것인가로 이동했습니다. 저자는 이 혼돈 속에서 지식 큐레이션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방대한 정보 속에서 가치를 가려내고 지식의 미래를 설계하는 능력이 바로 AI 시대의 핵심 인간지능입니다.


이 맥락에서 개인 주도적 큐레이션 활동을 잘 보여주는 '디지털 정원' 개념이 인상 깊었습니다. 디지털 정원은 아이디어가 씨앗처럼 뿌려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자라나며, 자연스럽게 가지를 뻗어 다른 생각들과 연결되는 유기적인 과정을 중시한다고 합니다.


이는 완성된 결과물 중심의 지식관을 뒤흔듭니다. 완벽한 결과물보다 지속적인 배움과 생각의 변화 과정을 기록하는 디지털 정원사의 자세를 짚어줍니다. 지식을 소유물이 아니라 돌봄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AI가 자동으로 추천해 주는 정보에 의존하기보다, 인간은 스스로의 지적 정원을 가꾸는 설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묵직하게 다가옵니다.


3부는 AI가 글을 쓰는 시대에 읽기와 쓰기는 여전히 인간의 고유한 영역일 수 있는가에 대해 풀어갑니다. 쐐기문자에서 인쇄술 그리고 디지털 텍스트로 이어지는 역사를 통해, 읽기와 쓰기의 본질은 기술이 아니라 맥락을 체화하는 능력에 있음을 짚어줍니다.





AI는 글쓰기, 요약, 번역, 심층 분석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지적 활동을 보조하고 때로는 주도하며 읽기와 쓰기의 풍경의 바꾸고 있지만, 인간이 문학을 읽으며 느끼는 아이러니, 시간의 겹, 실존적 불안은 통계적 언어 모델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코덱스가 여백을 만들어 지식 생산을 공동체적 행위로 바꾸었듯, AI는 오히려 인간 읽기의 깊이를 더 분명히 드러내는 거울이 됩니다.


4부는 소통의 문제를 다룹니다. 고대 아고라의 토론, 중세 수도사의 필사, 근대 지식인의 편지공화국을 거쳐 오늘날의 디지털 플랫폼까지 소통은 언제나 인간지능의 확장이었습니다. 그러나 AI와의 대화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AI에게는 우리 인간처럼 말을 이끌어내는 진정한 속마음, 즉 의도나 목적의식이 없다는 점을 짚어줍니다. AI는 이해하지 않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그 매끄러운 문장 뒤에는 책임도, 공감도 없습니다.


저자는 이 점을 강조하며 AI와의 소통이 인간적 관계를 대체할 수 없음을 이야기합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공감 능력과 윤리적 판단은 더욱 중요해진다고 말합니다.


마지막 5부는 『인간지능의 역사』의 사상적 핵심입니다. 앞선 네 가지 행위를 통해 살펴본 인간지능의 본질을 바탕으로 AI 시대의 지성, 지식, 인간의 개념을 새롭게 정립합니다. 목격을 넘어서 설계자로, AI와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창발적인 역동적 지성으로, 인간과 기술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공진화 관계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인간지능의 역사』는 인간지능은 고정된 능력이 아니라, 설계하고 연결하고 협력하는 과정적 현상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강점은 완전함이 아니라 불완전함 속에서 질문을 멈추지 않는 데 있습니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간지능의 긴 역사를 돌아보며 우리가 무엇을 잃고 얻어왔는지, 무엇을 지키고 버려야 하는지 성찰하는 것입니다. 


『인간지능의 역사』는 AI 담론에서 흔히 보이는 공포 마케팅도, 낙관적 기술 예찬도 택하지 않습니다. 대신 긴 호흡의 역사 속으로 우리를 데려가, 인간이 늘 기술 앞에서 어떻게 자신을 재정의해왔는지를 보여줍니다. 읽다 보면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이 AI 앞에서 어떻게 새로워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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