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 - 김주하 앵커가 단단한 목소리로 전하는 위로
김주하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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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오랜 시간 메인 뉴스를 책임지며 공적 언어의 기준을 보여주었던 김주하 앵커.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에서는 우리가 알던 김주하의 바깥이 아니라, 그 안쪽에서 울려 나온 기록입니다. 차분하고 정확한 발성 이면에 흔들렸던 숨의 리듬을 글자로 옮긴 에세이입니다.


이 책의 출발점은 목소리입니다. 목소리는 김주하에게 재능이기 이전에 질문이었고, 가능성이기 이전에 결핍이었습니다.


“아니 김주하 씨는 자기 목소리를 모르는 겁니까?”라는 말은 면접 탈락의 이유를 넘어섭니다. 자신의 핵심 자질이 부정당하는 순간의 충격, 그리고 그 충격이 이후 삶 전체를 관통하는 방식이 묘사됩니다.





김주하 앵커는 이 경험을 극복 서사로 소비하지 않습니다. 목소리는 훈련으로 다듬을 수 있었지만, 내가 나를 모른다는 질문은 오랫동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직선 코스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하나씩 해체해가는 과정이 돋보입니다.


최초의 여성 앵커 서사는 성취의 하이라이트로 그려지지만, 김주하 앵커의 이야기에서는 유리 천장은 깨지는 대상이기보다, 매일 부딪히며 자신의 자세를 점검해야 하는 벽에 가깝게 묘사됩니다.


여자 아나운서라는 이름이 기대와 제한을 동시에 부여하던 시절, 저자는 기술보다 태도를 선택합니다. 뉴스의 형식을 바꾸고, 편집자의 관점을 익히며, 줏대라는 원칙을 스스로에게 엄격하게 적용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줏대는 고집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도 선을 넘지 않는 직업윤리입니다. 알고리즘보다 양심을 앞세운 선택이었습니다.


찬란한 행복의 정점에서 세상은 송두리째 무너져 내렸고…라는 문장은 완벽한 삶의 신기루를 보여줍니다. 가장 읽기 힘들지만, 동시에 가장 멈출 수 없는 부분입니다. 사회적으로 완성된 삶처럼 보였던 결혼과 가정이 실은 거대한 기만 위에 세워져 있었다는 고백은, 개인사를 넘어서 성공한 여성이라는 이미지가 얼마나 허약한 균형 위에 놓여 있는지를 드러냅니다.


특히 헛똑똑이라는 자기 규정입니다. 세상의 진실을 전하던 앵커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인 거짓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자책은, 지성과 통찰이 사적 영역에서는 왜 무력해질 수 있는지를 질문하게 만듭니다.


가정폭력, 배신, 법정 투쟁이라는 소재는 자극적으로 흐르기 쉽지만, 김주하의 문장은 절제되어 있습니다. 아빠가 엄마도 못 때리고? 아빠랑 같이 안 살아도 되는 거야? 라고 말한 아이의 말은 어떤 판결보다 무겁습니다. 참는 것이 반드시 보호가 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배우게 됩니다. 침묵의 비용은 아이에게 전가된다는 것을 감정 과잉 없이 짚어냅니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방향을 바꿉니다. 개인의 생존 투쟁이 사회적 공감의 감각으로 전화되는 순간입니다. 김주하는 더 이상 피해자의 자리에 머물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겪은 결핍을 해석할 언어를 획득합니다. 상처가 경력이 되고, 고립이 연결의 자원이 되는 과정이 펼쳐집니다.





제목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갑니다』는 인터넷 밈에서 출발합니다. 2021년 MBN 뉴스7에서 한강 물도 곳곳이 꽁꽁 얼어붙었다는 김주하 앵커의 말로 시작했던 한파 관련 사고 뉴스 속에 이시열 기자의 꽁꽁 얼어붙은 한강 위로 고양이가 걸어다닙니다라는 장면이 들어가며 꽁냥이 밈이 탄생했습니다.


어찌보면 유쾌하게 소비된 밈이 이 책에서는 가장 무거운 은유가 됩니다. 위태롭게 보이는 얼음 위를 당당하게 걷는 고양이처럼 나아갔던 김주하 앵커. 자신의 고립 경험이 자립준비청년들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미끄러운 사회 위를 홀로 건너야 하는 그들에게 공감합니다. 밈은 웃고 지나갈 수 있지만, 현실은 책임을 요구합니다.


완벽이 아닌 온전함, AI 시대의 저널리즘, 공감의 윤리까지. 추상적이지 않습니다. 모두 한 사람의 몸을 통과해 나온 문장들이기 때문입니다. 앵커(Anchor)는 직업이 아니라 태도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누군가의 삶이 휩쓸리지 않도록 잠시 붙잡아주는 존재. 김주하는 이제 뉴스를 넘어, 그 역할을 확장합니다.


국민권익위원회 자립준비청년 명예멘토로 활동하며 실제로 그 약속을 지키고 있는 저자의 모습에서 우리는 개인의 아픔이 어떻게 사회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목격하게 됩니다.


'국민 앵커'라는 수식어 뒤에 가려진 김주하라는 개인의 삶에 대해 깊이 알지 못했습니다. MBC 아나운서로 입사해 여성 최초로 메이저 방송사의 메인 뉴스인 〈뉴스데스크〉를 단독 진행하며 한국 대표 앵커로 자리매김했고, 이후 MBN으로 이직해 10년간 메인 뉴스를 이끌어온 그녀의 커리어는 그야말로 성공의 상징처럼 보였습니다.


기자 시험 합격 후 보도국 기자로 활동하는 등 남성 중심의 언론계에서 최초와 최고의 타이틀을 스스로 쟁취해낸 노력은 수많은 직장인과 언론인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그 화려한 조명 뒤편에 숨겨져 있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장 깊고 어두운 고통의 기록을 펼쳐 보입니다.


자기 연민도, 영웅 서사도 없습니다. 상처를 해석하고 의미로 전환하는 지적 성실함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책은 읽고 나서도 조용히 남습니다. 얼음 위를 걸었던 발자국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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