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 예술가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31가지 방식
윌 곰퍼츠 지음, 주은정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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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미술평론가이자 저널리스트 윌 곰퍼츠(Will Gompertz)는의 신작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베스트셀러 《발칙한 현대미술사》를 통해 복잡하고 난해하게 여겨지던 현대미술을 대중의 눈높이로 끌어내린 저자입니다. 이번에는 예술가들의 가장 내밀한 본질,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고유한 시선을 탐구합니다.


이 책의 출발점은 우연이었습니다. 집필 중이던 윌 곰퍼츠가 강연 요청을 거절하자, 작가 톰 하비가 보내온 이메일 한 통이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조각가였던 아버지와 어린 시절 해변을 거닐던 사진과 함께 도착한 그 편지에는, 늘 아버지보다 한발 앞서 걸으며 조개껍질을 주웠지만 정작 가장 멋진 것을 발견하는 건 항상 뒤에서 '이것 봐!'라고 외치던 아버지였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주의를 기울이고 집중해 바로 그 순간을 살았다. 그는 아들에게 아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도록 가르쳐주었다. 이것이 많은 예술가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라며 윌 곰퍼츠는 이 일화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가들이 지닌 경이로운 시선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미술관에서 우리는 무엇을 놓치고 있을까요. 명화 앞에서 뭐가 대단한지 의아해하던 경험이 있다면 공감할 겁니다. BBC 예술 담당 편집장을 11년간 역임하고 영국 테이트 갤러리 관장을 지낸 윌 곰퍼츠는 작품 해설이 아니라, 예술가의 내면으로 직접 들어가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체험하게 해줍니다.


마치 예술가 본인이 되어 그들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체험하는 듯한 경이로운 경험을 선사합니다. 총 서른한 명의 작가와 그들의 단 하나의 작품을 심층적으로 해부합니다. 예술이란 궁극적으로 세상을 더 깊이 바라보도록 이끄는 시선의 기술임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예술가는 보는 일의 전문가라고 합니다. 그들은 세상을 그저 훑고 지나가는 대신, 사람과 장소, 사물을 끊임없이 시각적으로 캐묻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는 겁니다. 평범한 순간을 포착하여 예술로 끄집어내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합니다.


영국의 국민 화가로 불리는 데이비드 호크니는 자연의 색을 관찰하고 재해석하는 시선의 대가입니다. 그의 대작인 〈봄의 도래 (The Arrival of Spring)〉를 보면 나무줄기가 갈색이나 회색이 아닌, 강렬한 보랏빛을 띠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됩니다.


데이비드 호크니에게 나무의 색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빛의 미묘한 변화와 여러 시점들이 동시에 담기는 현실의 감각, 즉 시간을 품은 관찰의 결과입니다. 나무는 갈색이라는 선입견에 갇혀 눈앞의 경이로운 현실을 놓치고 있음을 깨닫게 합니다.


예술가들이 어떻게 현실의 규모, 재료, 그리고 사적인 영역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뒤흔드는지 보여주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거대한 공공 예술부터 가장 사적인 공간의 폭로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폭넓습니다.





크리스토와 잔 클로드 부부는 상상할 수 없는 규모의 스펙터클을 보는 눈을 가진 작가들입니다. 〈포장된 국회의사당 (Wrapped Reichstag)〉은 독일의 상징적인 건축물을 은빛 천으로 완전히 덮어버린 프로젝트였습니다.


이 행위는 건물의 역사적, 정치적 의미를 잠시 유보시키고, 일시적인 조각으로 만들었습니다. 영원불멸할 것 같던 권위와 구조물이 천 한 조각에 의해 잠시 낯선 존재로 바뀌는 순간, 대중은 비로소 그 구조물과 그 주변 공간을 새로운 시선으로 재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그들의 예술은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가장 강력하게 존재를 경험하게 만드는 재정의의 기술입니다.


버려진 폐품을 통해 역사의 서사를 구축하는 엘 아나추이는 마음의 눈으로 보기를 실천합니다. 수많은 술병 뚜껑을 납작하게 펴고 구리선으로 엮어 거대한 직물 형태의 설치 작품인 〈지구의 피부 (Earth's Skin)〉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습니다.


작품의 재료인 병뚜껑은 서양 열강과의 교역의 역사, 알코올 소비, 식민주의와 같은 아프리카의 깊은 서사를 내포합니다. 엘 아나추이는 버려진 재료에서 시간의 흔적 그리고 대안적인 가치를 발견하며 기념비적인 규모로 바꿔버렸습니다. 우리 주변의 가장 하찮은 것도 예술적 승화를 통해 장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음을 증명하는 연금술인 셈입니다.


감정의 미묘한 영역도 파고듭니다. 추상 표현주의의 거장인 애그니스 마틴은 미니멀리즘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가입니다.  작품 〈우정 (Friendship)〉은 격자무늬나 희미한 선으로 채워진 캔버스를 통해 시각적인 압도 대신, 고요함과 평온함을 전달합니다.


애그니스 마틴에게 예술은 격렬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명상에 가까운 깊은 사유와 감정을 향한 눈으로 포착된 섬세한 정서 그 자체였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현란함을 넘어 내면의 가장 은밀하고 순수한 상태인 우정, 행복, 고독과 같은 감정의 본질을 응시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영국의 개념 미술가 트레이시 에민은 내밀한 시선의 대표 주자입니다. 논란적인 작품 〈나의 침대 (My Bed)〉는 실제로 그녀가 우울증으로 며칠을 보냈던, 어지럽혀진 침대와 그 주변의 쓰레기, 담배꽁초 등을 미술관에 그대로 전시한 것입니다.


가장 부끄럽고, 고독하며, 지저분한 자신의 날것 그대로의 사적인 공간을 공개한 겁니다. 충격과 불편함을 주지만,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고통과 취약함에 대한 깊은 공감대를 형성합니다. 트레이시 에민은 자신의 가장 취약한 순간을 영혼을 보여줄 기회로 삼은 용감한 예술가입니다.


책 전체를 관통하는 것은 예술가의 작업이 고독한 충동이자 필연적 운명이라는 인식입니다. 경험 많은 예술가는 대개 쓰라린 경험을 통해서 예술 작품을 만드는 일이 좌절과 실망이 끝없이 이어지는 비참한 반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의 독특한 방식을 멈출 수 없기에 작품을 창조한다고 합니다.


그 고된 여정 끝에 탄생한 서른한 명의 예술가들의 시선은 이제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를 눈먼 상태에서 구출하고 삶의 풍요를 더합니다. 보는 방식을 바꾸는 순간, 당신의 삶은 예술이 됩니다.


예술가의 눈으로 세상을 다시 본다는 것의 의미를 전하는 『미술관에서 우리가 놓친 것들』. 30여 점의 도판과 함께 각 예술가의 대표작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는 구성이 매력적입니다.


윌 곰퍼츠는 작품 하나를 충분히 음미할 시간을 줍니다. 호크니의 나무 앞에서, 칼로의 자화상 앞에서, 마틴의 선들 앞에서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그 시간 동안 우리는 예술가의 눈을 빌려 세상을 다시 보게 됩니다.


예술가의 시선을 따라가는 일은 곧 나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작업임을 보여줍니다. 평범해 보이던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띠고 나타납니다. 아침 출근길 풍경이, 사무실 책상이, 집으로 돌아가는 저녁 하늘이 달라 보입니다. 윌 곰퍼츠가 원하는 예술의 역할입니다. 미술관 안에 갇힌 예술이 아니라, 삶 속으로 스며드는 예술. 보는 방식의 변화가 결국 사는 방식의 변화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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