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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 이론물리학자가 말하는 마음껏 실패할 자유
김현철 지음 / 갈매나무 / 2025년 10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30년 넘게 이론물리학 현역으로 살아온 과학자가 쓴 책이라고 하면, 아마 양자역학이니 상대성이론이니 하는 복잡한 공식을 풀어내는 책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은 예상을 뒤집습니다. 이 책은 과학자의 뇌와 심장으로 써 내려간 삶의 철학서에 가깝습니다.
김현철 교수는 독일 본대학교에서 핵자 구조와 쿼크를 연구하고, 미국과 일본 등에서 30여 년간 연구를 지속해온 이론물리학자입니다.
이 책에서는 어려운 이야기 대신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정말 당신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얼마나 길들여진 삶을 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진짜 나로 살 수 있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이론물리학자의 날카로운 통찰과 따뜻한 휴머니즘이 교차하며 우리 내부의 잠재된 주인의식을 일깨우는 따뜻한 사고실험입니다.

먼저 세상의 '길들임'에 저항하는 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획일화된 기준에 자신을 맞추며 살아가는지 짚어줍니다.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해 날개가 꺾인 학생들, 원하는 학과가 아니라 더 나은 학교를 위해 재수하는 학생들을 보며 저자는 "길든다는 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뤄진다. 모두가 당연시한다고 그것이 옳은 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저자가 인용하는 프리먼 다이슨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과학은 반역이다." 과학의 역사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을 전복하며 발전해 왔듯, 우리 삶도 사회가 정해놓은 틀을 의심하고 저항할 때 비로소 진짜 나다운 모습을 찾을 수 있다는 겁니다.
저자 자신도 이 '길들임'의 피해자였다는 고백이 이어집니다. 그는 실력으로 이겨내겠다는 미몽에 빠져 있던 자신을 돌아봅니다.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는 콤플렉스를 실력으로 증명하려 했던 젊은 날의 모습은 결국 학벌주의라는 틀 안에서 싸우고 있었던 겁니다.
저자는 자신이 완벽하게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세상은 변하지 않아도 나는 변할 수 있다. 선택은 오롯이 나의 몫이라고 말하며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시인을 꿈꿨지만 물리학자가 된 그에게 시는 실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저자는 시가 인생에 신의 한 수였음을 고백합니다. 헤겔의 말을 빌려 "가장 위대한 성공은 실패할 수 있는 자유에 달려있다"라고 말합니다.
시에 몰입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저자는 물리학에 뛰어들었을 때도 그 깊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핵물리학이라는 자연의 가장 깊숙한 곳을 탐구해 온 저자 자신의 학문적 여정과 그 과정에서 얻은 태도론을 통해 우리가 스스로 삶이라는 우주에서 어떻게 기능해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물리학에서 실패한 실험은 무의미한 결과가 아니라 다음 실험의 초기 조건을 정의하는 과정입니다. 그는 이 과학적 사고를 삶에 적용합니다. 한때 곁길로 갔다고 인생이 끝장나지 않는다며, 오히려 그것은 한 개인의 인생에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입니다.
그가 들려주는 제자들의 사례는 흥미롭습니다. 물리학을 포기하고 유튜버로 전향한 학생, 취업을 선택한 연구자, 전공을 완전히 바꾼 이들까지 이들의 선택은 사회의 기준에서 보면 실패일지 모르나, 저자는 그것이야말로 각자의 궤도를 찾아가는 과정이라 말합니다.
그는 혼돈을 품은 자만이 춤추는 별을 낳을 수 있다는 니체의 말을 끌어오며, 실패를 혼돈이 아닌 별의 씨앗으로 해석합니다. 혼돈은 결국 창발을 일으키는 조건이며, 실패는 인생의 엔트로피를 늘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냅니다.

후반부에서 저자는 물리학의 다차원적 사고를 인간 이해로 확장합니다. N차원에서 한 사람을 바라보면 내가 보지 못한 놀라운 능력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한다고 합니다.
사회는 사람을 1차원적 성적표로 서열화하지만, 인간의 가능성은 벡터적이라고 합니다. 물리학의 벡터가 방향과 크기를 모두 가지듯, 한 사람의 잠재력 또한 여러 차원에서 확장되는 겁니다.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성적만으로 한 줄로 세울 수 있겠냐고 반문합니다. 제자들을 가르친 경험을 통해, 성적이 아닌 가능을 보게 되었던 순간들을 회상합니다. 교육자로서의 고백이자 과학자가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찰법을 엿볼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학자가 세상에 남기는 것은 논문보다 사람을 키우는 일이라고 말하며 교육자로서의 소명을 재확인합니다.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것을 넘어, 나는 왜 세상의 기준으로 나를 재단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이론물리학자가 전하는 이 따뜻한 사고실험은 우리 모두에게 N차원의 스스로를 찾아낼 의무가 있음을 일깨워 줍니다. 저자가 말하는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삶이란, 바로 이 N차원의 자신을 발견하고 인정하는 삶입니다. 이 책은 각자가 자기 삶의 우주의 중심으로 당당하게 서도록 격려하는 찬란한 응원가입니다.
이론물리학자들의 가장 위대한 도구가 휴지통이라는 농담은 그들이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겪는지 보여줍니다. 수많은 계산과 가설이 휴지통으로 들어가지만,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습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진부한 격언이 아니라, 실패 그 자체가 하나의 성과라는 인식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자연 현상을 관찰하고, 가설을 세우고, 실험으로 검증하고, 때로는 기존 이론을 뒤집는 과정. 이 과학적 방법론은 삶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세상이 정해놓은 답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아가는 태도. 이것이야말로 저자가 평생 물리학을 하며 체득한 가장 큰 자산입니다.
소심심고(素心深考), 잘게 쪼갠 뒤에 해결하라는 원칙도 물리학에서 나온 것입니다. 복잡한 문제를 작은 단위로 나누어 하나씩 풀어가는 이 방법은 인생의 큰 문제들을 마주할 때도 유용합니다. 거대한 목표에 압도되어 포기하는 대신, 작은 단계들로 나누어 차근차근 나아가면 결국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책 곳곳에 실용적인 지혜들이 박혀 있습니다. 구체적인 공부 방법이나 연구 태도에 대해서도 조언합니다. 모두 삶의 태도와 연결됩니다. 문제를 작게 쪼개서 푸는 법,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동료와 협업하는 법 등은 모두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입니다.
실패를 자산으로 바꾸는 이론물리학자의 인생 강의 『우주의 중심으로 사는 법』. 과학과 인문학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스토리텔링에 흠뻑 빠져들게 만듭니다.